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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러운 영에 걸린 아이

월요일 차를 몰고 시내에 나가던 중인데 본당의 어느 아저씨에게 문자가 왔습니다.

- 신부님 부탁이...

그리고는 문자가 더이상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전화를 했습니다. 전화도 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냥 포기하고 하던 일을 할까 했는데 다른 번호로 전화가 옵니다. 문자를 보낸 사람이었습니다. 전화를 거는 중에 전화가 꺼졌다고 하면서 다른 번호로 연락을 해 왔습니다.

- 네, 왜 찾으시는지요?
- 제가 아는 사람 딸이 하나 있는데 좋지 않은 놀이(우리나라로 치면 분신사바)를 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행동이 괴팍하게 변하기 시작했다고 해요. 병원에서도 어쩔 도리가 없어서 지금 집에 있는데 신부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아서요.
- 알겠습니다. 그럼 집에서 만나 함께 가보도록 하지요.

집으로 와서 그분들을 모시고 출발했습니다. 도착한 곳은 공항 근처의 어느 마을. 집으로 들어서니 그 젊은 친구가 앉아 있더군요. 말을 하지 못하는 벙어리 여자 아이였습니다. 뭔가 초조하고 불안한 듯한 제스츄어를 하고 있었지요. 제가 다가서는 족족 표독스런 얼굴로 손사래를 치며 저를 거부하더군요. 자초지종을 들어 보았습니다. 약 한 주 전에 이 동네에서 유행하는 놀이를 했는데 지난 토요일 밤부터 시작해서 아이의 태도가 너무나 이상하게 변했다고 하더군요. 밥 먹는 것도 거부하고, 뭘 마시는 것도 거부하고, 씻지도 않으려 하고, 전에는 그렇게 웃고 장난을 좋아하던 아이가 지금은 누구든지 거부하고 난폭하게 변해 버렸다고 합니다. 병원에 데려가서 검사를 받아 보았지만 별달리 나오는 건 없고 병원에서도 제 손으로 링겔을 뽑고 난동을 피워서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데려왔다고 하네요.

간단히 설명을 했습니다. 사람은 단순히 육적인 존재가 아니라 영적인 존재이기도 한데 마치 장갑을 낀 손에 따라서 장갑이 움직이듯이 우리 안의 영의 종류에 따라서 우리의 행동 양식이 달라진다고 했지요.

별달리 한 건 없습니다. 성수를 축복하고 집 축복 예식을 거행했을 뿐입니다. 엑소시즘 같은 건 배워 본 적도 없고 할 권한도 없으니까요. 축복 예식 마침 무렵에 주님의 기도를 할 때에 아이가 못 견디겠다는 듯이 집 밖으로 나가 버리더군요. 그리고 집안 구석 구석에 성수를 뿌리고 아이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머리에 손을 얹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해 주었습니다. 그전까지 긴장하고 초조해 하던 아이가 순간 조용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머리에 손을 얹기 직전까지 그 아이는 쏘아보는 눈길로 저를 노려보고 있었지요. 하지만 축복을 마칠 즈음에는 상당히 안정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가족들도 놀라는 눈치였습니다. 그렇게 난리를 치던 아이가 의자에 조용히 앉아 있으니 말이지요. 아이를 주시하면서 경과를 조금 더 지켜 보았습니다. 말을 하지 못해서 대활르 나눌 수 없어 수화를 하는 다른 친구가 오기를 기다렸지요. 기다리는 동안 설명을 했습니다.

“모든 일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게 마련입니다. 이 아이가 물론 그 엉뚱한 장난을 했을지는 몰라도 실은 그 이전부터 무슨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어둠의 영은 어둠의 냄새를 맡고 다가오니까요. 집안에 다툼이 있거나 불화가 있거나 이 아이가 불안해 할 이유가 있는 가운데 나쁜 장난을 통해서 어둠의 영이 아이를 차지할 수 있는 거지요.”

그 설명을 하는데 그 아이의 언니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합니다. 뭔가 있기는 있는 모양이지요.

수화를 하는 아이가 도착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 벙어리 아이와 대화를 시도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대충 기억나는 대로 적어보면, 자신이 볼 수 있는 존재가 있는데 그 존재가 엄마랑 아빠를 나가라고 한다고 자꾸 말을 한답니다. 사실 수화를 하는 아이가 오기 전에 아이는 마치 자신 앞에 누가 있다는 듯이 그 존재와 수화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들은 것을 다시 가족들에게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혹시 아느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가족들이 하는 말이 엄마와 아빠가 아이가 하는 이상한 행동을 보고 그 안에 든 영을 쫓기 위해서 주술적인 행위를 했다고 하네요. 그래서 꾸중을 했습니다.

“그러한 행위는 오히려 어둠의 영을 끌어들일 뿐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모든 어둠의 영들을 조용히 시킬 수 있지요. 지금은 제가 가톨릭 사제로서 와 있고 집안을 축복했으니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엉뚱한 일로 도리어 어둠의 영을 끌어들이지 않기를 바래요.”

그 밖에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리 중요한 건 아니었습니다. 축복식때 쓰고 남은 성수를 잘 간직하고 수시로 이용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가족들 간에 서로 사랑하라고, 더는 불화나 다툼으로 다시 어둠의 영을 끌어들이는 일은 없길 바란다고, 그리고 주일 미사 좀 나가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이에게 말을 건네었지요.

“얘야, 이제 걱정하지 말아. 하지만 언제라도 다시 나쁜 일이 일어나면 신부님이 찾아올께. 알겠지? 그러니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아. 어둠의 영은 예수님보다 강하지 않아. 그러니 앞으로는 걱정하지 말거라.”

그리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과연 그 아이에게 일어난 일, 그리고 제가 행한 이 모든 일은 우연과 착오의 산물일까요? 아니면 실제 영의 움직임 속에서 일어난 일일까요? 이 모든 과정을 비디오로 담아 두었습니다. 언제 기회가 되면 보실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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