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환상 속의 그대


신학생 시절에는 피교육자의 입장에서 우리를 가르치는 교수 신부님들이 워낙 드높아 보였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그분들은 적어도 '사제'였고 거기다가 외국에서 뭐라도 따고 오신 분들이셨기 때문이었다. 사제 + 외국물 + 학위, 이런 것들이 혼합되어 일단 우리가 함부로 범접할 수는 없다는 인식이 강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에 이르러 신학교의 신부님들이 내 또래 정도가 되고 심지어는 나보다 후배인 신부님도 신학교에서 교수직을 맡게 되는 걸 보면서 보다 현실적인 상황을 알아보는 눈이 열리게 된다. 신부님들은 구원 여정에 있어서 '완성된' 존재가 아닌 것이다. 사제들은 자신들이 부름받은 사제직이라는 소명 안에서 길을 찾고 성실하게 응답해 나가야 하는 사람들이다.


하나의 단적인 예로, 신학교 안에는 '영성그룹'이라는 것이 존재했다. 신학교에 상주하는 교수 신부님을 필두로 다양한 학년층에서 그 신부님을 고해 사제로 삼고 한 달에 한 번씩 자신의 영적 상담을 하러 가는 그룹이었다. 헌데 동기들 사이에서는 당연히 자신의 일상을 나누면서 서로가 머무르는 '영성그룹'의 실태를 엿볼 수 있게 된다.


기본은 영성을 살피는 것이지만, 어떤 종류의 영성 그룹은 그 담당 신부님의 성향에 따라서 '술판'을 벌이기로 유명한 그룹도 있었다. 당시에만 하더라도 신부님이 되려면 술을 잘 마셔야 한다는 것이 통념이었고, 영성 그룹을 통해서 들려오는 일화도 그냥 그런 줄 알았던 일이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영성을 보살피러 가는 곳에서 도리어 술이라는 '악습'을 배워 오기도 하는 것이다.


그것 외에도 그때에는 그렇게 하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게 받아들여지는 일들이 종종 있었다. 


흔히 평신도 분들은 사제나 수도자에 대해서 일종의 '환상'을 품게 된다. 자신이 겪어 보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분들이기에 그렇게 느끼게 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군대를 가 보지 않은 채로 군대를 갔다온 삼촌의 군생활 이야기를 듣는 초등학생의 마음에 형성되는 군대의 이미지처럼, 막상 겪어볼 수 없는 그 생활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키워가며 그렇게 키운 환상을 본당에서 마주치는 신부님과 수녀님에게 덮어씌우게 되는 것이다.


사제직이나 봉헌생활은 분명 아름답고 소중한 것이다. 하지만 혼인이라는 거룩한 사명도 마찬가지다. 올바로 잘 가꾸어진 혼인생활은 누가 보더라도 존경스럽고 아름다운 모습을 지니고 있다. 마찬가지로 사제직과 봉헌생활도 그러하다. 그저 그것을 받았다고 끝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받아들인 그 아름다운 소명을 올바로 살아내어야 하는 것이다.


신부님을 존경하는 것, 수도자를 물심 양면으로 돕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하지만 사제나 수도자는 그런 상황을 절대로 '당연한 듯'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오히려 겸손하게 우리가 그런 대접을 받을 자격에 합당하지 않다는 생각을 품고 우리를 존경해주시는 분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품고 하느님의 뜻 안에 더욱 충실히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


다른 한 편, 사제를 존경하는 것과 세속의 물을 들이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사제를 존경해서 그분이 하느님의 뜻에 맞게끔 살도록 돕는 일과, 그분을 존경한다면서 오히려 세상에 휘둘릴 정도의 지나친 인간적 사랑을 내던지는 것은 전혀 다른 두가지 일이다. 사제와 수도자의 성화를 위해서 진심으로 기도해야 하고 또 평신도 역시도 '거룩한 삶'을 살도록 기도할 줄 알아야 한다. 지나친 세속적 관심으로 그분들의 여정을 하느님의 길에서 벗어나게 하면 그 사람 역시도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신부님을 모시고 지나치게 화려하고 값비싼 취미 활동이나 본연의 직분에 손상을 줄 정도의 술자리를 자꾸 추진하는 분들은 자제할 필요가 있다.


말도 안되는 환상을 품는 것과, 올바른 방향의 희망을 갖는 것의 차이, 거기에는 우리가 가 닿고자 하는 곳의 올바른 이미지를 아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우리가 편하자고 하느님의 자녀가 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영원 안에서 얻게 될 하느님의 참된 생명의 나라를 위해서 이 땅에서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신 당신의 외아드님을 따르는 여정을 선택한 이들이다. 이 길은 좁고 험해서 좀처럼 사람들이 가려 하지 않는 길이다. 이제 환상을 벗어던지고 신앙의 현실을 직시할 때가 왔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성체를 모시는 방법

- 성체를 손으로 모시는 게 신성모독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일단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입으로 직접 받아 모셔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수난 만찬때에 제자들과 모여 함께 나눈 빵을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만 벌리고 받아 모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손으로 빵을 받아서 나누어 옆의 동료들에게 나누어가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성체에 대한 공경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감에 따라 부스러기 하나라도 흘리지 않으려는 극진한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리고 받아모시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또 입으로 모시다가 자꾸 사제의 손에 침이 발리니 위생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손으로 받아 모시게 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곳은 입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손으로 받아 모십니다. - 그럼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건가요? - 제가 보았을 때에는 성체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체를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손으로 모시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할 필요는 없지요. 여기서는(볼리비아에서는) 입으로 모시는 사람과 손으로 모시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고 둘 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모시는 이들의 혀가 제 손에 자꾸만 닿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이는 굉장히 비위생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모시는 것이 성체를 흘리고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모시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지요. 다만 손으로 모실 때에는 미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왼손 아래에 오른손을 받치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왼손으로 성체를 받아 뒤의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나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 손에 남은 부스러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입으로 가져가서 혓바닥으로 깨끗이 처리할 필요가 있지요

신부님이랑 목사님은 뭐가 달라요?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미사 봉헌

미사를 봉헌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간단하게 우리가 알고 있는 바를 말하자면 사무실에 가서 해당하는 비용을 내고 기도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올리는 행위를 ‘미사 봉헌’이라고 말합니다. 헌데 우리는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을까요? 미사를 봉헌하면 어떤 효과가 나타나는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연옥 영혼들을 위한 효과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망자를 기억하면서 그를 위해서 드리는 미사는 그 영혼에게 효과가 미칩니다. 물론 무슨 효과가 얼마나 미칠지 우리는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의 공로로 인해서 그 영혼은 자비를 입게 되고 자신이 채워야 할 수난의 시간을 메꿀 수 있습니다. 이는 수많은 성인들의 실제적인 증언으로 우리가 알게 된 것입니다. 또한 살아있는 이들을 위해서 드리는 미사도 그 효과를 발휘합니다. 하지만 이 때에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정성은 받아들여지지만 그 은총의 효과는 하느님이 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병자가 건강하기를 바랄 수 있지만 그의 건강의 회복은 오직 하느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가 건강을 회복하고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까지 아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이러한 효과들이 단순히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미사를 드리는 우리의 정성이 중요한 것이지요. 돈을 지불하는 것이 우리의 정성의 일부분이 되는 이유는 우리가 지닌 돈은 결국 우리의 정성을 모아서 벌어들인 돈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물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봉헌하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 더욱 소중한 정성입니다. 미사에 참례해서 진심으로 그 미사의 말씀을 듣고 성찬의 전례에 온전히 참례하게 된다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미사의 은총을 더욱 배가 될 것이 틀림 없습니다. 나아가 우리가 그런 미사 참례를 통해서 드리는 봉헌의 행위로 우리의 삶 자체는 변화될 것이고 무엇보다도 그 모든 은총의 결과물은 바로 우리의 몫이 될 것입니다. 저는 진실한 마음으로 미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