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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떠나다




내가 밥을 먹을 때는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는 정해진 시간을 두고 그 시간에 밥을 먹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내가 배가 고플 때에 밥을 먹는 것입니다. 인간이 추구하는 시간은 전자에 가깝고 하느님이 추구하는 시간은 후자에 가깝습니다.


우리는 정해진 시간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시간 안에 모든 것을 완료하고 싶고 끝내고 싶어합니다. 그러다보니 다 익지도 않은 열매를 따려고 하고 준비도 되지 않았는데 마무리를 지으려고 합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소리가 이런 오류에서 비롯합니다. '나는 언제까지 살 것이다.', '나는 이런 계획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모든 인간적인 계획이 무너지는 체험을 자주 하게 됩니다. 건강을 기반으로 수립한 계획이 어느 순간의 사고로 모두 무너져 버리고 맙니다. 여행을 가기로 했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으면 여행 계획은 무용지물입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우리는 제 몸 하나 가누지조차 못하는 나약한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건강할 때, 아직 기력이 있을 때를 믿고는 하느님의 뜻을 헤아려보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수많은 오류를 양산해 냅니다.


반면 하느님은 느긋합니다. 당신의 때는 따로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일이 완수되는 때가 당신이 정한 때가 됩니다. 이 사람이 안되면 저 사람을 하면 되고, 이 세대가 안되면 한참 시간이 흐른 다른 세대를 통해서 당신의 계획을 이어 나가면 됩니다. 그러니 당신은 조급할 일이 없습니다. 느긋하게 일을 처리하십니다.


사도들은 예수님 앞에서 묻습니다.

“주님, 지금이 주님께서 이스라엘에 다시 나라를 일으키실 때입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무심한 듯 대답하십니다.

“그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권한으로 정하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다."

때가 차기를 기다리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궁금해하는 것을 만족시켜 주시려고 존재하는 분이 아닙니다. 당신은 묵묵히 당신의 일을 하실 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어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남기십니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아무 짝에도 소용없는 호기심으로 하느님의 영역을 탐내지 말고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물병에 물을 채운다고 상상해 봅시다. 수도꼭지에서 졸졸 나오는 물이 물병을 채우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에게는 물잔이 하나 있어서 옆에 있는 샘에서 물을 길어 그 물병에 같이 넣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물병이 더 빨리 차게 됩니다. 이로써 우리는 우리의 작은 노력으로 그 때와 시기를 앞당기는 것입니다.


종말은 언제 올까요? 그것은 하느님의 말씀이 온 세상에 퍼지는 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때를 앞당기는 데에 조력할 수 있습니다. 또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퍼져 있는 말씀에 방해를 가해서 쌓아올린 탑을 무너뜨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시대를 살고 있고 어떤 역할을 하고 있을까요? 말씀을 전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면 다행입니다. 하지만 있는 말씀마저 무너뜨리고 있다면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자들은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만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지금껏 자신을 이끌어주던 지도자를 잃은 사람들의 정상적인 반응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제부터야말로 일을 시작할 때입니다. 부모의 슬하에서 살아오던 자녀는 모든 복잡한 일을 부모에게 맡겨 버립니다. 하지만 그 부모에게서 독립하고 나면 스스로 생을 꾸려 나가야 합니다. 사람은 그렇게 어른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일부러 승천하십니다. 제자들이 당신만 쳐다보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입니다.


따지고보면 승천이라는 사건은 신기하고 좋은 체험이라기보다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황망한 사건이었습니다. 그것은 스승과의 이별이고 주님과의 멀어짐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때를 위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가야 진리의 영께서 오신다고 했습니다. 이제는 툴툴 털고 일어날 때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해야 하는 일을 시작해야 할 때입니다.


주님은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에는 우리에게 얼마나 성장해 왔는지 열매를 내놓으라고 요구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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