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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말씀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식탁 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일에는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사실 교회는 이 우선순위에 따라 일을 진행시켜 왔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무엇이 더 소중한 일인지 혼돈을 일으킬 때가 많습니다.


교회의 핵심은 말씀에 있습니다.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는 것, 그렇게 해서 사람들을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는 것이 교회 활동의 핵심에 위치한 것입니다. 나머지 일들은 그 일을 위한 보조적 수단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데에 필요하다면 학교도 만들었고 말씀을 전하기 위한 수단을 삼기 위해서 병원도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상 사명인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서 교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이 세상 안에서 자리를 잡고 나면 신경써야 할 것들이 생겨나게 마련입니다. 말씀이 핵심이던 시절에는 건물이 있건 없건 상관없이 말씀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정해진 구역이 없기 때문에 어디든지 복음이 선포되기 쉬운 구조입니다. 하지만 건물이 생기고 나면 그 건물 자체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러다보면 건물을 돌보는 것이 우선인지 영적인 성전을 돌보는 것이 우선인지 헷갈려 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믿음이 커 나가지 않는데 건물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실제로 유럽의 수많은 성당들은 더이상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도리어 세상에 팔려 나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닙니다. 수많은 공소들이 폐허가 되어 있고 그런 자리들에 대한 처리 문제가 대두되고 있는 오늘날입니다. 또한 선교를 목적으로 지어진 학교와 병원이 더는 본래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거꾸로 세상의 흐름을 발맞춰 가느라 가톨릭적인 색깔을 지워 나가기 시작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와중에도 정반대로 흘러가는 곳도 있습니다. '거룩함'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곳이면 사람들이 오히려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그러한 곳은 도리어 생명력이 되살아납니다.


사실 부모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이를 체감할 수 있습니다. 자식들이 찾아오고 싶어하지 않는 부모가 있습니다. 또한 반대로 아무리 먼 거리라도 일부러 찾아오고 싶은 부모도 있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진가를 아는 이들은 멀리서도 하느님의 향기를 찾아오게 마련입니다. 반대로 하느님을 바라지 않는 자녀들은 아무리 가까이 살아도 찾아오지 않습니다.


과연 오늘날의 교회 안에서 우리는 말씀의 향기를 찾아볼 수 있을까요? 행여 큰 사업의 향기, 인맥의 향기, 온갖 세속적 욕구들이 난무하는 교회가 되어가고 있지는 않을까요? 반성해 볼 문제입니다.


그러니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서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내십시오. 그들에게 이 직무를 맡기고,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


초대 교회의 사목 위원은 7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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