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요동치는 것입니다. 어제의 마음이 다르고 오늘의 마음이 다르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마음 안에서 쏟아져 나오는 모든 것에 지나친 무게를 두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실천'입니다. 의심하지만 믿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 믿는다면서 실천하지 않는 사람보다 나은 법입니다. 부활 이후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나 그분을 바라보면서도 의심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믿음 안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바는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는 하나의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1)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우리가 따르려는 분은 때에 따라서 변동되는 분이 아닙니다. 오늘까지 나의 상사이다가 다른 상사가 와서 자리바꿈을 하게 될 허수아비가 아닙니다. 우리가 따르는 예수님은 하늘과 땅, 영적인 세상과 물질계를 통틀어서 모든 권한을 받으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믿음은 이 첫번째 명제 안에 굳건히 뿌리 박아야 합니다. 이 전제가 없으면 뒤에 이어질 그분의 명령 역시도 의미가 없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실제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명령을 아랑곳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그들은 세상 안에서 자신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이들을 두려워하면서도 하느님에 대한 존경이나 사랑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느님이 그럴 능력이 있다고 실제로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명을 이행함에 있어서 이 첫번째 전제를 굳게 쥐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으신 분이십니다.
2) 너희는 가서
파견을 보내는 명령입니다.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르려면 우리가 익숙한 영역, 우리가 안락을 누리는 영역을 벗어나야 합니다. 편한 것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절대로 신앙의 여정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신앙은 근본적으로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데려가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우리가 지금 몸담고 있는 이 세상을 최종적으로는 떠나야 한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우리는 떠나야 합니다. 내가 편안함을 느끼는 이 현세의 영역을 떠나 주님께서 명령하시는 것을 이행해야 합니다.
3)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선교에는 따로 대상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물론 이 말이 한 사람에게 모든 책임을 지우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본당을 돌아다니며 사목을 할 이유는 없고 반대로 제가 여러분의 직장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이유도 없습니다. 우리는 서로 각자가 서 있는 자리에서 복음 전파의 대상을 올바로 찾아야 합니다. 어떤 이는 스스로에게부터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며, 또 반대로 어떤 자녀들을 부모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서 있는 자리에서 아직 어둠이 자리하고 있는 곳에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하나는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모든 이는 복음 전파의 대상이지만 모두가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제자들도 복음 선포 여정을 떠나면서 그들의 말을 듣지 않는 고을에는 발에 먼지를 털고 나오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바오로 사도도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이들 앞에서 옷의 먼지를 털며 여러분들의 멸망은 여러분의 책임이라고 선언하고 나옵니다. 이런 일들을 복음을 성심껏 전파하는 이들이 겪어야 하는 수난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복음은 모든 이에게 전해집니다. 받아들이는 건 그들의 몫입니다.
4)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물론 우리 가톨릭 교회는 '세례성사'라는 예식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예식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시작하는 소중한 예식입니다. 하지만 세례의 본질은 교적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진정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도록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당으로 질질 끌고 와서 물을 부으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짠 맛을 그들이 보고 그들도 그 짠 맛의 의미를 이해하도록 하고 짠 맛에 끌리도록 하라는 명령입니다. 이름이라는 것도 마찬가지 의미로 사용됩니다. 만일 누군가가 마진우 신부를 안다고 하는 것이 단순히 초전성당 신자이기 때문에 주임사제를 안다고 하는 것이라면 저는 코웃음을 칠 것입니다. 저를 안다고 하는 것은 제가 뜻하는 바, 제가 지향하는 바를 이해하고 뒤따른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이 이름에 담겨 있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분들이 지향하는 바를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뒤따르게 하자는 의미입니다.
5)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예수님은 어딜 가나 가르쳤습니다. 믿음의 삶의 기반에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우리는 배우지 않은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사용할 수도 없습니다. 믿음은 배워야 마땅합니다. 그리고 배우기 위해서는 가르치는 이가 존재해야 합니다. 하지만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하는 것은 정말 중요한 주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이라고 합니다. 그건 과연 무엇일까요?
신앙을 가르치라고 하면 엉뚱한 것을 배우려고 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의 역사를 잔뜩 배우고는 자신이 신앙에 대해서 안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는 마치 볼리비아에 온 관광객이 관광정보 책자에 나오는 내용을 달달 외우고는 자신이 볼리비아를 잘 안다고 웅변을 쏟아내는 것과 비슷합니다. 정작 볼리비아에 8년을 살아온 저는 볼리비아가 여전히 미지의 영역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사람은 볼리비아의 인구수, 면적, 사회적 특성과 같은 정보를 잔뜩 읽고는 그것이 볼리비아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정보가 중요한 게 아니라 예수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이렇게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수난을 이야기하는 예수님 앞에서 묻기조차 두려워하는 제자들과 비슷합니다.
6)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예수님께서 명령하시는 것들은 사실상 우리에게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의 신실함 가운데 약속을 하십니다.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우리와 함께 있겠다는 약속입니다. 우리가 이 약속을 기억한다면 예수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각자의 세상은 각자의 죽음으로 마무리됩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주님과 함께 머무르는 이들입니다. 주님은 약속을 지키다가 말다가 하는 분이 아닙니다. 그런 분이면 주님의 자격도 없습니다. 주님은 약속을 지키는 분이십니다. 문제는 우리입니다. 우리는 이 약속을 철저히 기억해야 합니다. 특히나 힘들고 괴로운 순간에 이 약속을 기억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우리는 절대로 혼자가 아닙니다. 가장 힘들고 괴로운 순간 주님께서는 더더욱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세상 안에서 맺어져 온 모든 관계는 끝나 버리고 맙니다. 하지만 주님은 세상 끝 날까지, 그리고 새로운 세상에서도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