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안에 있다






그날,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또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먹는 음식의 결과물입니다. 우리의 몸은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으며 전에 머물러 있던 것들은 노폐물로 빠져나가고 새롭게 섭취하는 것이 새로운 세포를 형성시킵니다. 건강한 음식을 먹는 사람은 건강한 세포가 형성되게 되고 반대로 온갖 식품 첨가물이 난무한 음식을 계속 먹게 되면 그것이 독으로 작용해서 건강하지 못한 몸을 지니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가 먹는 것으로 우리의 몸을 형성합니다.


이와 같은 원리는 영혼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섭취하는 것으로 우리의 영혼을 형성하게 됩니다. 언제나 호기심의 중심에 서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비밀이나 캐고 다니고 수근거리고 누군가를 욕하고 험담하는 일에 동참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섭취하는 영혼의 음식은 더러운 것입니다. 이런 이들은 언제나 속이 시끄럽고 어지러우며 안정되지 못한 내면을 지니고 있습니다. 먹고 다니는 것이 더러운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며 그 말씀을 바탕으로 나 자신의 삶을 반추하고 언제나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어 가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이들은 하루하루 하느님 가까이 다가가는 여정에 올라 있는 사람입니다. 비록 지금 당장 모든 것을 실천하지는 못하더라도 꾸준히 좋은 영혼의 양식을 먹고 마시면서 하루 하루 정진하다보면 하느님은 작은 일에 충실한 그 영혼을 통해서 큰 일도 이루시게 됩니다.


성체성사의 신비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는 이해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우리는 미사에 나아와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 모십니다. 이 음식은 어떻게 작용하는 것일까요? 하느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당신의 은총을 보이는 것으로 바꾸어 우리에게 전해 주십니다. 그래서 성체성사를 통해서는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영적 양식이 눈에 뚜렷이 보이는 성체의 신비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됩니다.


하지만 성체를 어떻게 모셔야 하는 것일까요? 그냥 가서 먹기만 하면 끝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저마다의 질료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그릇에 놓아야 합니다. 물을 구멍이 숭숭 뚫린 소쿠리에 담겠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물이 그냥 통과해 버릴 테니까요. 당연히 생명의 양식은 믿음의 그릇으로 담아야 합니다. 거룩한 양식, 천상의 만나는 우리의 영혼의 믿음의 그릇으로 담아내야 합니다.


우리의 눈에는 작게 보이는 성체이지만 우리는 성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더 큰 것이 적은 것을 받아들이는 법입니다. 적은 것이 큰 것을 담아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성체를 모신다고 생각하겠지만 오히려 주님께서 우리를 받아들이시는 것이고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이 우리를 담아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체를 믿음으로 모시는 사람은 자신의 영혼에 예수님을 옷 입듯 입는 사람이 되고 그로 인해서 예수님을 점점 더 닮아가게 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닮아가듯이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꾸준히 받아 모시게 되면 우리는 예수님과 닮아가게 됩니다. 닮는다는 것은 얼굴이 닮는다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의지가 닮는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것을 나도 사랑하게 되고 예수님께서 싫어하는 것을 나도 싫어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셨고 소외된 이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교만한 자들을 내치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예수님을 사랑하겠다고 모인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하느님께서 근본적으로 의도하시는 바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닌 다른 어떤 것도 원치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다시 성경 구절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이제는 읽고 계시는 것이 이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날,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또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성체를 모시는 방법

- 성체를 손으로 모시는 게 신성모독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일단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입으로 직접 받아 모셔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수난 만찬때에 제자들과 모여 함께 나눈 빵을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만 벌리고 받아 모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손으로 빵을 받아서 나누어 옆의 동료들에게 나누어가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성체에 대한 공경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감에 따라 부스러기 하나라도 흘리지 않으려는 극진한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리고 받아모시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또 입으로 모시다가 자꾸 사제의 손에 침이 발리니 위생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손으로 받아 모시게 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곳은 입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손으로 받아 모십니다. - 그럼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건가요? - 제가 보았을 때에는 성체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체를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손으로 모시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할 필요는 없지요. 여기서는(볼리비아에서는) 입으로 모시는 사람과 손으로 모시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고 둘 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모시는 이들의 혀가 제 손에 자꾸만 닿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이는 굉장히 비위생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모시는 것이 성체를 흘리고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모시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지요. 다만 손으로 모실 때에는 미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왼손 아래에 오른손을 받치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왼손으로 성체를 받아 뒤의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나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 손에 남은 부스러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입으로 가져가서 혓바닥으로 깨끗이 처리할 필요가 있지요...

신부님이랑 목사님은 뭐가 달라요?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미사 봉헌

미사를 봉헌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간단하게 우리가 알고 있는 바를 말하자면 사무실에 가서 해당하는 비용을 내고 기도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올리는 행위를 ‘미사 봉헌’이라고 말합니다. 헌데 우리는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을까요? 미사를 봉헌하면 어떤 효과가 나타나는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연옥 영혼들을 위한 효과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망자를 기억하면서 그를 위해서 드리는 미사는 그 영혼에게 효과가 미칩니다. 물론 무슨 효과가 얼마나 미칠지 우리는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의 공로로 인해서 그 영혼은 자비를 입게 되고 자신이 채워야 할 수난의 시간을 메꿀 수 있습니다. 이는 수많은 성인들의 실제적인 증언으로 우리가 알게 된 것입니다. 또한 살아있는 이들을 위해서 드리는 미사도 그 효과를 발휘합니다. 하지만 이 때에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정성은 받아들여지지만 그 은총의 효과는 하느님이 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병자가 건강하기를 바랄 수 있지만 그의 건강의 회복은 오직 하느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가 건강을 회복하고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까지 아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이러한 효과들이 단순히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미사를 드리는 우리의 정성이 중요한 것이지요. 돈을 지불하는 것이 우리의 정성의 일부분이 되는 이유는 우리가 지닌 돈은 결국 우리의 정성을 모아서 벌어들인 돈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물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봉헌하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 더욱 소중한 정성입니다. 미사에 참례해서 진심으로 그 미사의 말씀을 듣고 성찬의 전례에 온전히 참례하게 된다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미사의 은총을 더욱 배가 될 것이 틀림 없습니다. 나아가 우리가 그런 미사 참례를 통해서 드리는 봉헌의 행위로 우리의 삶 자체는 변화될 것이고 무엇보다도 그 모든 은총의 결과물은 바로 우리의 몫이 될 것입니다. 저는 진실한 마음으로 미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