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라는 개념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정말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가지고 있는 게 맞을까요? 아닙니다. 많은 이들은 자신이 쓰지도 못하는 것을 지니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창고에 물건이 있다고 그 물건이 창고 것이 되지는 않습니다. 창고의 물건은 그 주인에게 속한 물건일 뿐입니다.
우리는 때로 창고가 되고 싶어합니다. 평생을 두고도 다 쓰지도 못할 자원을 손에 쥐고 살아가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창고의 운명은 하나 뿐입니다. 잠시 채워지고 때가 되면 비워지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외부로부터 강도가 들기도 합니다. 그러면 내 안에 지니고 있던 것들마저 빼앗기게 됩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소유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건 바로 내가 현실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 실제의 목적대로 내가 돌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집이라는 곳은 내가 편안히 머무르고 쉴 수 있는 곳을 집이라고 합니다. 즉, 공간 자체의 존재 여부보다 내가 어디에 머무를 수 있는가가 집을 형성한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어디에서든 잘 수 있는 사람은 어디든지 집이 됩니다. 하느님을 따라 자신의 삶을 선택한 사람은 믿는 이들 누구에게나 환영을 받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어디를 가든지 그곳에서 머무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곳은 곧 그들에게 집이 됩니다. 저는 볼리비아에도 집이 있고 이곳에도 집이 있습니다. 인도네시아에도 호주에서도, 일본과 미국에도 집이 있습니다. 어디든 제가 가는 곳에는 복음에 목마른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복음을 듣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공간을 저에게 기쁘게 내어 주었습니다.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관계를 의미합니다. 그저 피를 나누었다고 다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가 되지는 않습니다. 자기보다 자녀를 더 소중히 여기는 어머니가 있는가 하면 자식이 아픈데도 한 번 찾아보지도 않는 어머니도 있습니다. 또한 적지 않은 경우에 서로의 탐욕으로 인해서 형제간에 자매간에 다투고 싸우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특히나 유산 문제로 싸우는 집안이 많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둘도 없는 사이로 지내던 이들이 마음 속에 욕심이 깃드는 순간부터 서로 원수가 되고 맙니다. 반대로 뜻을 같이 하는 사람은 형제와 자매보다 더 끈끈한 우정을 나누기도 합니다.
누가 나의 형제입니까? 내가 하느님의 뜻을 향해서 나아가는 데에 조력하는 사람이 진정한 형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누가 강도 당한 사람의 형제가 되어 주었느냐?'고 물으십니다. 그건 바로 그 사람을 도운 이방민족이었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진정으로 도울 때에 우리는 그들의 마음을 얻게 됩니다. 부유한 이들에게 빵을 나누면 그들은 겉치레 인사로 고맙다고 하겠지만 내면으로 진정 감사하기는 커녕 때로는 자신이 받은 것의 물건값을 따져가면서 심지어는 기분 나빠하기까지 합니다. 반면 배고픈 이에게 음식을 주는 이는 그가 배불리 먹으면서 느끼게 되는 감사를 얻게 됩니다. 때로 우리는 너무 부유하게 살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누군가에게서 무엇을 받아서 전혀 기쁨을 느끼지 않을 정도라면 우리는 이미 부유한 사람인 셈입니다. 그렇다면 영혼이 위험해 집니다.
토지라는 것은 집과 비슷한 느낌이지만 조금은 다릅니다. 집은 거주를 위한 곳이라면 땅은 영혼을 싹틔울 영역을 말합니다. 하느님을 진정으로 따르는 사람은 자신이 영혼을 기를 수 있는 영역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습니다. 게으른 사람들은 자신의 몫을 타인에게 떠넘기기에 바쁩니다. 하지만 복음을 위해서 생을 헌신하는 사람은 없던 땅도 영혼을 키워내기 위해서 경작합니다. 복음을 전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늘 주변을 바라보면서 다른 이들을 신앙으로 초대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자녀들조차 신앙으로 이끌기를 실패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토지를 내던지는 사람들이 됩니다. 복음을 전한 기회는 성가심이나 괴로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선물받는 백 배의 토지입니다. 저는 이 토지를 넉넉히 백 배 이상으로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하지만 이 모든 일들은 '박해'와 함께 합니다. 세상은 있는 사람들을 챙기고 존중합니다. 돈이 있어야 뭐라도 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이 많고 세상의 힘과 권력이 없는 사람은 너무나 쉽게 무시 당하고 박해까지 각오해야 합니다. 사실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세속에 속한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합니다. 전통적으로 세상의 권력은 멍청한 백성을 원합니다. 그래야 선동하기 쉽고 말을 잘 듣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복음을 전하는 이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하느님의 빛으로 밝히기 때문에 세상의 권력은 빛을 전하는 사람을 싫어합니다.
세상의 힘은 인간의 내면의 욕구를 바탕으로 유혹을 합니다. 하지만 그 유혹거리가 내면에 없는 사람은 유혹당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복음의 열정에 사로잡힌 사람을 유혹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고 따라서 세상의 힘은 그들을 증오하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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