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기쁜 소식, 즉 복음은 다음과 같은 사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성경 말씀대로 우리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사흗날에 되살아나시고 나타나셨습니다."
문제는 이것이 왜 기쁜 소식이 되는지 우리가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기쁨의 근거가 여전히 이 땅에 속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흔히 부모님들은 자녀가 잘 되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하는 것이 잘 되는 것이냐고 물으면 그에 대한 대답은 저마다 다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세상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대답은 '성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성공이 내포하는 의미는 부를 얻어 누리는 것을 기본으로 해서 세상의 영예와 권능을 누리는 것입니다. 돈을 엄청 많이 벌거나, 유명해지거나, 권력 있는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세속적 성공의 기준으로 칩니다. 우리 초전 동네 어귀를 들어오다보면 곧잘 현수막이 걸리곤 합니다. 바로 그 현수막의 대상이 되는 것이 흔한 세상의 성공의 기준점입니다.
제가 선교지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에 사람들은 선교지에서의 저의 기쁨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누가 보더라도 그곳은 더럽고 힘들고 고독하고 수고스러운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세상적 기준으로는 그곳은 고통과 쓰라림이 가득할 수 밖에 없는 곳입니다. 하지만 복음을 전하려는 이에게 그곳은 맑은 영혼들이 있고 가르침을 순히 받아들이는 이들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최근들어 찍은 저의 사진들을 그때 당시의 사진과 비교해 보아도 그때 저는 더 활기차고 즐거워 보였습니다. 비록 몸은 고달프고 힘들었지만 내적인 보람은 더할 나위 없이 드높았기 때문입니다.
한국에 돌아오고 나서 이런 질문을 받기도 합니다. '신부님, 본당 사목하시니까 좋지요?' 사실 저는 이런 경우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잠시 망설이게 됩니다. 왜냐하면 질문자의 의도가 정말 복음화의 기쁨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본당에 오니 편안하고 좋냐는 질문인지 헷갈리기 때문입니다.
신학교나 수도원을 가겠느냐는 질문을 받는 아이에게서 더이상 '네 가고 싶어요'라는 말을 들을 수 없는 이유도 너무나 단순합니다. 그것은 그 아이가 바라보는 시선 속에서 사제나 수도자의 여정은 전혀 '좋아'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온갖 SNS를 통해서 이미 유투버나 유명 연예인처럼 호화롭고 사치스런 모습에 익숙해져 버려 세상이라는 가치에 물들어버린 아이에게 사제직이나 수도서원이 가지는 매력은 너무나 초라해 보일 수 밖에 없습니다. 하긴 이제 성당에서 아이들 자체를 볼 수가 없으니 이런 고민조차도 사치스러운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복음은 여전히 생생히 울려퍼지고 있고 그 가치는 하나도 퇴색되지 않았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표현처럼 '헛되이 믿지' 않는다면 올바른 믿음 속에서 기쁜 소식은 여전히 기쁜 소식입니다. 마치 오래 기다려온 친구를 만나는 것과 같은 기쁨, 너무나 간절히 바라던 바를 얻는 것과 같은 기쁨은 아직도 거룩한 미사 속에, 사제와의 거룩한 만남 속에 숨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조차 제자들은 예수님을 앞에 두고 아버지를 뵙게 해 달라고 떼를 씁니다. 그들은 지금껏 보았지만 보지 못한 것입니다. 무엇이 자신들에게 아버지를 보여주고 있는지 그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건 신기한 구름의 형상이나 기이한 자연 현상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보여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성이고 그분이 하시는 복음화의 열정에 대한 일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 예수님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분이 하시는 일 뿐만이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은 그분의 분명한 약속입니다. 저는 그렇게 될 줄을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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