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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전성당 레지오 특강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은총이라는 것은 외국어에서 '선물'이라는 의미를 지닌 단어입니다. 은총은 전적으로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지는 당신의 고유한 능력, 힘을 의미합니다. 만일 우리가 서로 주고 받을 수 있는 것이었다면 은총으로 표현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한 것은 그저 주고 받으면 그만이니까요. 우리가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것을 하느님께서 선물로 내어주실 때에 은총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에게 가장 고유한 것은 그분의 진리와 선과 사랑, 의로움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것이 우리에게 주어질 때에 우리는 그것을 은총으로 인지하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힘이 전달되는 방식은 다채롭습니다. 그리고 그 전달의 영역은 순전히 우리가 원하고 바라는 것만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은 곧잘 사람의 아들이 받게 될 영광에 대해서 언급하는데 그것은 십자가의 사건이라는 현세적 영역을 통해서 최종적으로 주어지게 되는 영원한 영광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영원의 영역은 좀처럼 감지되지 않고 우리에게 드러나는 것은 '십자가'의 외견입니다. 즉, 우리가 좋게 느끼건 아니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에게 은총을 선물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여러 사건들 중에 이해할 수 없이 벌어지는 사건들 안에 은총이 포함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은총은 보장된 수단들을 통해서도 전달이 됩니다. 은총을 받게끔 디자인되어 있는 교회의 고유한 영역이 있으니 그것을 성사라고 합니다. 우리는 교회 안의 모든 성사를 통해서 정해진 은총을 받습니다. 세례성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성체성사를 통해서 영혼의 양식을 얻는 식입니다. 그 밖에도 사제의 안수나 축복 행위와 같은 여러가지 형태의 준성사나 기도, 단식, 자선의 거룩한 행위를 통해서도 은총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의 핵심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모든 은총의 근본적인 통로는 바로 하느님의 외아들이신 예수님에게 존재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맞닿아 있는 모든 것을 통해서 은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아무리 좋은 것을 주더라도 그것을 흘려 버린다면 의미가 없습니다. 비가 오는데 땅 위에 비닐을 덮어놓고 있으면 비가 그 땅을 축여줄 리가 없습니다. 비를 머금기 위해서는 비닐을 걷어내어야 하며 마찬가지로 영혼에 은총의 단비가 내리기 위해서는 죄악의 비닐을 걷어 내어야 합니다. 사실 은총을 수령하는 데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작업은 다름아닌 올바른 회개입니다. 이 올바른 회개가 먼저 있지 않고서는 우리는 은총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회개가 뚜껑을 벗기는 역할을 한다면 믿음은 빨아당기는 역할을 합니다. 이것 역시 중요한 부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가림막이 없더라도 이미 축축히 젖어 있는 스펀지는 더이상 물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씨앗이 심겨져 있지 않다면 그곳에 아무리 물을 뿌려도 싹은 자라나지 않는 법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이라는 간절함을 갖추어 놓아야 합니다. 믿음이 우리의 내면에 형성되지 않으면 아무리 예수 그리스도 가까이 머무른다 하더라도 아무런 성과를 얻을 수 없습니다. 사실 성경에서 우리는 훌륭한 예시를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 주변에 수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밀치고 다녔지만 그분에게서 은총의 힘을 얻어낸 이는 오직 하혈하던 여인 뿐이었습니다. 또 더러운 영에 걸린 사람을 두고 돼지를 치던 그 고을 사람은 기뻐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을 고을에서 쫓아내 버렸습니다. 내면에 믿음이 형성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것을 내놓는다 하더라도 받아들일 리가 없습니다.



기뻐하소서


기쁨은 쾌락과 구별되는 요소입니다. 쾌락은 외적으로 주어지는 것에서 얻어지는 즐거움이고 기쁨은 내면의 평화에서 뿜어져 나오는 요소입니다. 그래서 쾌락은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외적인 수단을 통해서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쾌락을 가져다주는 수단은 세상에서의 성공, 그리고 그 가운데 핵심 요소는 재화, 즉 돈이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돈을 벌려고 하고 비축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돈의 양을 통해서 내적 안정을 꾀해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는 절대로 내면의 안정에 가 닿을 수 없습니다. 길 자체가 엇나 있기 때문입니다. 돈은 아무리 벌어도 그에 상응하는 탐욕이 함께 내면에 자리잡기 때문에 결코 만족할 수 없고 안정을 얻을 수 없습니다.


기쁨은 내면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어린 시절 이런 기쁨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엄마 뱃속에서 아무런 장애 요소가 없을 때에 우리는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태어나서도 한참 동안은 이런 영혼의 기쁨을 만끽하고 살고 보통 아이들은 이런 기쁨을 주변에 흩뿌리고 다닙니다. 아이들의 천진함 속에서 그것을 지켜보는 어른의 영혼은 쉬게 됩니다. 그들의 맑은 영혼은 그 자체가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기쁨을 누리던 내면은 세상과 맞닿으면서 점차 변질되게 됩니다. 세상은 영혼이 평화를 누리는 것을 방해하고 이 기쁨을 빼앗아 가려고 애를 씁니다. 그렇게 세상에 흐름에 자신을 맡겨 버리고 나면 우리의 영혼은 기쁨에 둔감해지게 됩니다. 아침에 마주하는 이슬 방울에 경탄할 줄 모르게 되고 작은 새의 날갯짓을 신기하게 바라보지도 못하게 됩니다. 쾌락에 점점 젖어가기 시작하면서 기쁨에 둔감한 영혼으로 변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기쁨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해야 합니다. 다름아닌 영혼의 순수성을 회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영혼을 맑히는 작업은 우리의 노력과 은총의 힘이 합쳐져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마치 환자가 의사에게 다가가서 환부를 열어 보이고 의사는 치료 작업을 시작하듯이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영혼의 의사이신 분에게 내어 보여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스스로 내어맡기는 우리의 영혼을 살펴보시고 당신의 정화를 시작하십니다.


씻어내는 데에는 많은 은총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부족함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물리적인 씻어냄은 오염도에 따라서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필요하다면 솔질도 해야 하고 세제도 써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영혼도 그 내면에 찌든 때를 벗겨내는 데에는 많은 '시련'이 필요합니다. 담배를 한 대도 피지 않는 사람이 앞으로 영원히 담배를 피지 않아야 한다고 하면 도리어 좋아할 것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담배를 꽤나 오래 태워온 사람은 자신의 그 습관에서 벗어나는 데에 상당한 곤란을 겪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영혼의 오염도 그 정도에 따라 그것을 벗어나는 데에 많은 시련을 경험을 필요로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하느님은 부족함이 없으시고 또 불가능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의사이신 분은 전능하셔서 우리의 영혼을 깨끗이 씻어내고 그 기쁨을 돌려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우리가 오늘 함께 모인 중심에는 성모님께서 계십니다. 성모님은 바로 이 은총과 기쁨이 가득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모님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성모송의 앞부분은 '주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이라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그것은 가브리엘 천사의 인사였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하느님께서 성모님에게 당신의 외아들을 선물하셨고 그것으로 인해서 성모님에게 은총이 가득하고 기쁨이 가득할 것이라고 선언하고 계십니다.


주님과 함께 한다는 것은 그저 허울 좋은 종교적 활동을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주님과 함께 한다는 것은 주님이 걸어가신 여정을 함께 걷는다는 의미이고 그분이 살아가신 삶을 닮아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의 여정은 수난과 죽음과 부활로 요약됩니다. 수난이 없어서도 안되고, 죽음이 없어서도 안되며, 부활이 없어서도 안됩니다. 레지오 단원은 주님과 함께 하기 위해서 수난을 각오해야 하고, 때로는 과거의 삶, 죄스런 삶에서 죽음을 겪기도 해야 하며, 나아가 부활을 늘 꿈꾸고 살아야 합니다.


성모님은 교회의 어머니이시고 묵시록에서는 교회로 표상됩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활동의 핵심에는 말씀이 존재해야 합니다. 우리는 말씀 안에서 길을 찾고 힘을 얻으며 살아갑니다. 올바른 말씀이 선재되지 않으면 우리는 열심히 하는데 헛된 활동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길을 걷는 사람은 불행합니다. 그는 순간순간 시선을 빼앗는 것들에 잠시 넋을 놓을 수는 있겠지만 근원적인 불안에서 해방되지 못합니다. 길 끝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 여정은 하나의 길이며 우리는 그 길을 올바른 궤도에 올려 두어야 합니다. 성모님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은총'과 '기쁨'의 여정을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은총과 기쁨을 얻기 위해서 언제나 주님과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길이 험해도 우리가 목적지에 가 닿을 수 있다면 그곳에서 모든 시름을 내려놓을 것입니다. 자녀를 낳는 어미는 산고가 심해도 마침내 자녀의 탄생을 통해 고난에서 해방되고 기쁨을 누리는 법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 마지막으로 탄생되는 그날까지 묵묵히 이 길을 함께 걸어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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