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이 없는 이에게 물건을 건네줄 수 없듯이, 의리가 없는 이에게 우정을 선물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흔히 하느님을 '대상화' 해서 기계 장치인 것 처럼 생각합니다. 뭔가 집어넣으면 그에 상응하는 것이 나오는 자판기 기계 장치 같은 것입니다. 성당에 많은 돈을 내면 축복을 주는 식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기계가 아닙니다. 인간에게 마음을 주신 분이 어찌 당신은 냉혹한 기계가 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은 우리와 '우정'을 맺을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과의 우정, 즉 친교를 준비해 나가야 합니다.
한동안 멀어져 지내다가 불쑥 찾아와서 '너 나 알지?'라고 하는 사람을 우리는 친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저를 아십니까? 저는 당신을 모르겠는데요?'라고 응대하는 것이 더 합당합니다. 평소에는 연락 한 번 없다가 갑자기 찾아와서 친한 척을 하는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 다른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평소에 하느님과의 관계를 형성해 두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어느날 내가 급할 때 찾아와서 하느님더러 나를 받아달라고 하는 것은 낯선 이를 집안에 들여 달라고 부탁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영원히 살 듯이 세상을 살아가지만 우리에게 마지막 순간이 다가온다는 것은 철이 들면서부터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을 준비해 본 적이 없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알지만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어떻게 죽을 수 있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그 기본 원리는 너무나 간단합니다.
"너희 가운데 가장 보잘 것 없는 이 하나에게 해 준 것"에 따라서 우리의 죽음의 모습은 달라지게 됩니다. 무언가 해 주었으면 기대할 것이 있고 없으면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죽음은 우리에게 분명한 현실을 보여줍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소유하던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 내면에 형성된 탐욕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또 한 분의 망자를 하느님 곁에 보내면서 하느님은 우리에게 말씀을 건네고 계십니다. 대구교구의 성직자 묘지 앞에는 이런 글귀가 있습니다.
Hodie mihi, cras tibi
이 말은 '오늘은 나, 내일은 너'라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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