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다양한 고난이 있습니다. 자신이 교묘한 거짓말을 하다가 들통나서 곤란을 겪게 되는 고난이 있는가 하면 애를 낳는 산모 곁에 있다가 머리가 쥐어뜯기는 고난도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 고난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악을 행하다가 겪는 고난과 선을 행하다가 겪는 고난이 그것입니다.
신앙인의 바른 지향은 언제나 진리를 향해서 방향지워져 있습니다. 우리는 완벽하지는 않지만 우리 내면의 방향은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영원한 생명이며 구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근본 방향을 놓치지만 않는다면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어디를 향해서 가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신앙인들이 있습니다. 외적으로는 성당에 열심한 모양을 지니고 있지만 실제 내면이 추구하는 방향은 신앙의 본질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들이 진정으로 희망하는 바가 무엇인지 대답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자신의 내면이 추구하는 방향이 뒤틀려 버릴 때에 그들은 피상적으로 유지해오던 종교 활동을 가차없이 내던져 버리곤 합니다. 그것으로 이미 그들의 본질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 의로움을 추구하는 이들은 자신이 굳게 믿는 바를 충실하게 지키고 있습니다. 결국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알고 계실 것이고 최종적으로 모든 것을 바르게 세워 주실 것을 신뢰하고 믿기 때문에 용기를 잃지 않고 묵묵하고 꿋꿋하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서술합니다.
"바른 양심을 가지고 온유하고 공손하게 대답하십시오.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여러분의 선한 처신을 비방하는 자들이, 여러분을 중상하는 바로 그 일로 부끄러운 일을 당할 것입니다."
돈이 없다는 것이 수치가 되지는 않습니다. 영혼이 헐벗은 것이 수치가 됩니다. 하지만 세상은 거꾸로 가르칩니다. 거짓말을 하더라도 돈을 벌어 두는 것이 사람들 보기에 낫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사기꾼들이 판을 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옳지 못한 수단이라도 성공만 한다면 그만이라는 식의 가르침은 결국 사람들의 내면에 어둠을 형성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벌어도 누리지 못하는 악순환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집 한 채만 있어도 충분히 만족하리라 착각했지만 집이 생기면 더 좋은 집이 눈에 들어오고 그들의 영혼은 그렇게 한없이 고통당하게 됩니다.
반면 영원한 진리 안에서 기쁨을 찾는 이들은 심지어 고난 가운데에서도 기쁨을 누립니다. 베드로 사도는 "하느님의 뜻이라면,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겪는 것이 악을 행하다가 고난을 겪는 것보다 낫습니다."라고 표현합니다.
신앙 안에서 그리스도의 고난, 즉 의로우신 분께서 불의한 자들을 위하여 겪는 고난은 영광의 근거가 됩니다. 세상의 모든 영웅들이 고통을 감내하고 마침내 그 영광을 누리는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은 악과 맞서 의로움을 추구하면서 고난을 겪지만 결국 영원한 생명 안에서 영광을 누릴 것입니다.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들아, 모두 와서 들어라. 그분이 나에게 하신 일을 들려주리라. 내 기도를 물리치지 않으시고, 당신 자애를 거두지 않으셨으니, 하느님은 찬미받으소서.
댓글
매너리즘 같은 이야기일수 있으나 최소 저에게 만은 신부님 말씀이 목자의 목소리 같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