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가다




욕심이 없으면 싸움이 없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소리입니다. 원하는 것이 없는데 싸울 이유는 없습니다. 사과 하나를 가운데 두고서도 두 사람이 서로 사과를 원치 않는다면 싸우지 않습니다. 그냥 서로 먹으라고 하고 말 것입니다.


욕구에는 두 가지 방향이 존재합니다. 하나는 거룩한 욕구이고 다른 하나는 세속적 욕구입니다. 이 둘은 추구하는 바가 완전히 다르지만 때로는 대상이 겹치기도 합니다. 거룩한 욕구를 위해서 필요한 것을 준비하는 이가 있고 세속적 욕구를 위해서 필요한 것을 준비하는 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이 두 욕구가 충돌해 부딪히기도 합니다.


악마는 사람의 영혼을 원합니다. 그것은 더러운 욕구입니다. 그들은 사람에게 들러붙으며 그의 영혼이 하느님에게서 멀어져서 탐욕에 젖어들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거기서 멈추지 않고 선한 영혼들이 하느님에게 다가가는 것을 가로막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오늘 1독서에 많은 사람에게 붙어 있던 더러운 영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빌붙어서 그들의 영혼을 타락의 길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쫓겨 나갈 때에는 반드시 반향을 불러 일으키고 나갑니다. 큰 소리라는 것은 비단 우리 귀로 들리는 소리가 아니라 영혼의 산만함과 속시끄러움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더러운 영혼들은 절대로 그냥 나가는 법이 없고 시끄러운 소리를 남겨 두고 나갑니다.


반면 성령은 거룩한 욕구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이끌어 가려는 욕구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들이 세상에 물드는 것을 가로막는 데에 힘쓰고 회개로 초대하게 하며 아픈 영혼들을 치유해 줍니다. 성경이 말하는 중풍 병자와 불구자는 외적인 장애를 의미하기보다 내적인 장애를 의미합니다. 중풍 병자는 마비가 일어나서 움직이기조차 힘든 영혼을 말합니다.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다보니 영적인 것에는 일절 꿈쩍도 하지 않는 영혼들입니다. 술을 마시러 가자는 초대나 돈을 엄청 벌게 해 주겠다는 초대에는 거침없이 나아가지만 성당에 가서 기도를 하자거나 성경 강의가 있으니 가자는 초대에는 중풍이라도 걸린 듯이 움직임이 없습니다. 불구자는 똑바로 걷고 싶지만 휘청대는 사람을 말합니다. 영혼의 한 부분이 정상 작동을 하지 않아서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께 나아가고는 싶지만 실질적인 삶의 영역에서 자꾸만 넘어지고 쓰러지는 영혼들을 말합니다. 험담하는 악습이나 누군가에 대한 원한을 정돈하지 못해서 영혼이 자꾸 기울어지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들이 바로 영혼의 불구자가 됩니다.


거룩한 영은 이런 이들을 고쳐 버립니다. 중풍 병자에게는 새로운 활력을 불러 일으켜서 움직이게 만들고 절룩거리는 영혼들은 올바른 방향으로 걸어가게 영혼을 치유해 줍니다. 물론 이런 치유에는 아픔이 동반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마치 담배에 찌든 사람이 금연을 시작하면 내면이 엄청 괴로운 것처럼 영혼의 여정도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어 가기 위해서는 내면에 저항감이 생겨나게 됩니다.


하나의 본당은 하나의 운명 공동체이며 하나의 인격으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 어떤 본당은 더러운 영이 붙어 있기도 하고 어떤 본당은 중풍에 걸려 있기도 하며 또 어떤 본당은 불구자의 형태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다가오시면 이런 본당들의 내면이 치유되게 됩니다. 비록 시끄러운 소리가 나긴 하겠지만 그것이 곧 더러운 영들이 나간다는 훌륭한 징표가 됩니다. 이러한 치유의 마지막에는 큰 기쁨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거룩한 영, 즉 성령은 사도들의 안수에서 전달됩니다. 하지만 그 안수는 머리만 들이민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믿는 마음으로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성령 강림 대축일을 기다리며 우리의 내면을 잘 준비해서 성령을 가득히 받아 우리의 초전 공동체가 더러운 영에서 해방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신부님이랑 목사님은 뭐가 달라요?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성체를 모시는 방법

- 성체를 손으로 모시는 게 신성모독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일단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입으로 직접 받아 모셔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수난 만찬때에 제자들과 모여 함께 나눈 빵을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만 벌리고 받아 모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손으로 빵을 받아서 나누어 옆의 동료들에게 나누어가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성체에 대한 공경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감에 따라 부스러기 하나라도 흘리지 않으려는 극진한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리고 받아모시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또 입으로 모시다가 자꾸 사제의 손에 침이 발리니 위생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손으로 받아 모시게 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곳은 입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손으로 받아 모십니다. - 그럼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건가요? - 제가 보았을 때에는 성체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체를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손으로 모시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할 필요는 없지요. 여기서는(볼리비아에서는) 입으로 모시는 사람과 손으로 모시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고 둘 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모시는 이들의 혀가 제 손에 자꾸만 닿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이는 굉장히 비위생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모시는 것이 성체를 흘리고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모시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지요. 다만 손으로 모실 때에는 미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왼손 아래에 오른손을 받치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왼손으로 성체를 받아 뒤의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나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 손에 남은 부스러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입으로 가져가서 혓바닥으로 깨끗이 처리할 필요가 있지요...

준주성범

준주성범 라틴어로 씌어진 15세기의 신심서(信心書). 저자는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 1380~1471)로 알려져 있다. 모두 4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편의 제목은 `영적 생활에 유익한 훈계'(Admonitiones ad spritualem vitam utiles), 2편의 제목은 `내적 생활을 지도하는 훈계'(Admonitiones ad interna trahentes), 3편의 제목은 `내적 위안을 얻는 법'(Liber internae consolationis), 4편의 제목은 `성체성사에 대한 훈계'(Devota exhortatio ad sacram communionem)이며, 1,2편은 주로 묵상과 기도로 이루어져 있고, 3,4편은 대화(對話)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그리스도교인 생활의 기본원리들을 명백히 밝혀 주는 영신지도서로서 교회 신심에 많은 영향을 주어 일찍부터 세계 각국어로 번역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냐시오(Ignatius de Royola)의 《영신수련》에 이용되었고, 또 17세기에 일어난 프로테스탄트의 경건주의(敬虔主義, pietismus)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활동하던 서양 선교사들이 한역(漢譯)한 《경세금서》(經世金書), 《준주성범》이 전해져 두 책 모두 한글로 번역 필사되었고, 1938년 연길교구의 차일라이스(V. Zeileis, 徐) 신부가 라틴어 원본을 번역한 《준주성범》이 간행되었으며 그 뒤 1954년 윤을수(尹乙洙) 신부가 새로 번역한 《준주성범》이 경향잡지사에서 간행되어 현재까지 널리 읽히고 있다. 이 책은 전 세계적으로 성서 다음 많이 읽히는 책이다. 제1편 영적생활에 대한 유익한 훈계 제1장 그리스도를 본받음과 세상의 모든 헛된 것을 업신여김 1. "나를 따라오는 사람은 어둠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 (요한 8,12) 이라고 주께서 말씀하셨다. 이는 그리스도 께서 우리를 훈계하시는 말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