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주어졌지만, 저 바깥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그저 비유로만 다가간다.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여 저들이 돌아와 용서받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마르 4,11-12)
우리가 본다고 하는 행위는 외부에 있는 사물을 그저 바라보아 인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내부에서 보고자 하는 의도가 외부의 상을 받아들여 인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려는 마음이 없으면 아무리 바깥에 무언가가 있어도 보이지 않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길을 가다가 만나는 수많은 풀꽃들과 곤충들에 경이를 느꼈습니다. 한여름 아스팔트 위로 피어나는 아지랑이가 신기하게 느껴져서 한참을 쪼그리고 앉아 그걸 쳐다보던 기억이 납니다. 학교가는 길 가에 있던 시냇물에 송사리들이 떼로 헤엄치는 모습도 한참을 쳐다보곤 했습니다.
이제 어른이 되니 그런 것들이 좀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뭔가 신기할 것도 없고 일상인 풍경이 되어 버렸습니다. 가끔 외지인들이 오면 초전성당 근처에 너무나 많은 비닐 하우스를 이상하다 하고 또 초전 시내에 수도 없이 많은 다방과 커피숍을 이상하다 하지만 여기에서 사시는 분들에게 이 장면들은 그저 일상일 뿐입니다. 익숙해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보고자 하는 사람이 보는 것입니다. 외부에 단순히 내비친다고 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로 하늘 나라의 말씀도 마찬가지 의미를 지닙니다. 보려는 의도가 없는 이에게는 볼 수 없는 것이 하늘나라의 비밀입니다. 듣고자 하지 않는 이에게는 들어도 들리지 않는 것이 하늘나라의 비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보려고 했고 듣고자 했으니 그들은 그물과 배와 아버지를 버리고 따라 나섰고 그들은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바깥 사람으로 표현되는 이들, 보려고 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보여주고 들려주어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탐욕이 가득한 이에게 가난한 이는 경멸의 대상일 뿐입니다. 하지만 하늘 나라를 찾는 이들에게는 그들이 참된 의미의 재산입니다. 세속성이 가득한 이에게 신앙은 조롱의 대상일 뿐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에 대한 충실한 사랑이 있는 이에게 신앙은 보물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밭에 묻힌 보물을 위해서 자신의 온 생애를 내어바칠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눈에 보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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