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관계 속에서 태어나고 관계 속에서 자라나며 관계 속에서 생활합니다. 태어나는 순간 부모와 자녀라는 관계가 형성됩니다. 물론 낳은 부모가 다르고 기른 부모가 다를 수도 있습니다. 이든 저든 낳았다는 그 행위 하나로 적어도 하나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그리고 성장했다는 것은 누군가가 돌보았다는 것이기에 그 역시 관계 안에서 형성되는 것입니다. 말을 할 줄 아는 것도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었다는 것이기에 역시 관계를 예비합니다.
신앙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이니 신앙도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홀로 하는 신앙 따위는 사실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현대에 와서 사람들이 가능한 귀찮고 성가신 일을 피하고 홀로 신앙의 요소를 즐기고 싶어하지만 사실 그런 이들은 갈수록 하느님에게 멀어지기만 할 뿐입니다. 교회라는 것은 인간이 자연스럽게 형성해 낸 사회 공동체가 아니라 애초에 하느님의 '부르심'으로 탄생한 것이니까요. 심지어 하늘나라도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살고 있지 않은 이는 하느님의 근본적인 부르심 가운데 하나인 공동체로의 부르심을 거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불렀고 그 제자들은 다른 이들을 불러서 교회가 존재하는 것이고 그 교회가 부르니 사람들은 '하느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교회'라는 관계는 단순히 제도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즉, 그저 세례를 받아서 교적이 등록되었다고 교회 안의 관계에 들어선다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관계, 나아가서 하느님과의 관계는 제도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그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친지들과 그분의 어머님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이미 지난 복음에(토요일) 그들의 목적이 나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미쳤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님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의중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친척들의 성화에 못이겨 함께 오셨겠지요. 지금은 이 이야기를 옆으로 제쳐 놓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친척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려고 오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붙잡아 그분이 하는 일을 가로막으려고 온 셈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기회를 통해 '관계'에 대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사실 모든 관계는 지상에서 머무는 동안 우리에게 선물된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관계는 새로이 정립될 관계입니다. 훗날 천국과 지옥으로 우리의 목적지가 달라질 때에 지상에서 이루어오던 '관계'는 더이상 의미를 갖지 못할 것입니다. 하늘 나라의 백성이 될 이들은 모두 한 분이신 하느님 앞에서 자녀들이 될 것이며 우리는 모두 형제가 될 것입니다. 그때에는 부모와 자녀로 만난 이들로 서로 형제가 될 것이며 지상에서 부부도 절친한 친구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관계의 가장 근본적인 조건은 하느님의 뜻을 잘 알고 그 뜻을 구체적으로 실행하였는지가 될 것입니다.
지상에서의 관계는 절대적이 아닙니다. 나쁜 부모를 만날 수도 있고, 엉망진창인 대부모를 만날 수도 있습니다. 소중한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마음이 변질되어버려 뒷통수를 맞는 체험도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영원 안에서 형성될 참된 관계를 준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조건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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