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을 믿는 이들에게는 하느님을 믿지 않는 것이 좀처럼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믿는 이들은 '믿지 않는 이들'을 들어보기는 했어도 진정으로 그들을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지 않는 이들은 믿는 이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 둘이 한 자리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비슷해 보이는 활동을 같이 할 수 있습니다. 미사도 함께 드릴 수 있고 판공도 함께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내면에서 추수해 가는 것은 전혀 다른 것들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이들은 하느님에게 연계된 것을 추수해 가고 반대로 믿지 않는 이들은 세상의 요소들을 거두어 들입니다.
믿지 않는 이들은 고통받지 않음을 근간으로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능한 고통을 피하고 세상의 이득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신앙생활도 그 기본을 근간으로 합니다. 그들은 신앙 안에서 '얻을 것'이 있어서 머무르고 유지합니다. 그래서 시련이나 고통이 다가오면 그들은 물러서고 신앙을 외면합니다. 우리는 그들을 잃었다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원래부터 그들의 내면에 존재하던 본질이 발동된 것 뿐입니다.
반대로 믿는 이들은 주님에 대한 사랑을 근간으로 합니다. 이들에게 하느님과 그분의 외아들은 지워낼 수 없는 신앙의 대상이고 그분들이 바라시는 바, 하느님의 뜻, 십자가의 의미를 이해하는 이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시련이 다가올 때에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그 안에 담겨 있을 하느님의 뜻을 이해하고 시련을 감내하고 이겨낼 수 있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 앞에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때로 다가오는 죽음의 시련 앞에서도 그들은 신앙을 선택하게 됩니다.
세상은 이런 참된 신앙인들을 속이려고 합니다. 교묘하게 다가와서 속삭이는 그들의 말들 속에는 '신앙은 어리석은 것, 적당히 하는 게 좋은 것'이라는 말이 숨어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좋음을 설파하고 세상의 기준에 따라 살아가도록 하느님의 자녀들을 유혹합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 하느님의 자녀들은 '기름부음', 즉 성령의 도유를 받은 이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내면에 활동하시는 성령을 지니고 있어서 그분이 바라시고 원하시는 것을 이해하는 이들입니다.
하지만 서술된 모든 것들은 '변화될' 여지가 있습니다. 이 말은 하느님을 믿지 않는 이도 하느님을 믿게 될 수 있고, 반대로 하느님을 믿는 이들도 유혹을 통해서 자신의 신앙이 변질되고 용기를 잃어버릴 수도 있는 법입니다. 그래서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 순간, 즉 주님께서 나타나실 때에 우리가 확신을 가지고 주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도록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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