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은총의 약속





은총의 약속


우리는 현세 안에서 많은 것을 주고 받습니다그리고 그것을 ‘거래라고 합니다가장 기본적인 거래는  앞에서 이루어집니다가게에서 물건을 사는 것입니다내가 물건을 가져오고 그에 상응하는 돈을 지불합니다이것이 세상의 약속이고  약속은 거의 즉각적으로 이루어집니다.


황당한 소리처럼 들리겠지만사실상 신앙도 일종의 거래입니다다만 세상의 거래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점이  있습니다그것은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않는 ’,  은총을 거래한다는 것이고   거래는 ‘영원이라는시간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의 아브람을 봅시다아브람은 하느님에게 자식이 없는 섭섭함을 이야기합니다그러자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늘을 쳐다보아라네가   있거든  별들을 세어 보아라너의 후손이 저렇게많아질 것이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아브람은 고작해야 본처인 사라에게서 낳은 이사악과 사람의 몸종인 하가르에게서 낳은 이스마엘그리고 크투라라는 후청에게서 얻은 지므란욕산므단미디안이스박수아까지 해서전부 8 뿐입니다오늘날에 비하면 많지만 별들처럼 많은 숫자는 아닙니다그러면 아브람아브라함은 하느님께 속은 것일까요?


하느님의 약속은 현세적인 약속이 아니었습니다하느님의 약속은 영적인 것이었고 아브라함의 직계 자손에대한 이야기가 아닌 영적인 자녀들믿음의 자녀들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그래서 아브라함은 믿음의 아버지가 되었고 결국 우리 모두가 아브라함의 영적 자녀라고   있습니다또한 앞으로 존재하게  수많은신앙인들을 모두 더해서 아브라함은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은 자녀를 지니게  것이고  기쁨을 영원 안에서 향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비슷한 상황이 펼쳐집니다.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 아주 간단한 도식입니다헌데 구원이라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그래서 우리는 너무나 쉽게 구원의 대체제를 찾아다닙니다 성당에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나아오는 것이 아니라 세속적 야욕을 위해서 나아오게 되는 것입니다어떤 본당은 본당 간부들끼리 감투 싸움을 하고 있고 어떤 본당은  때문에 싸우고 어떤 본당은 헛된세속적 야욕을 쫓아 본당이 시끌시끌합니다마치 모세가 시나이산에 올라가 계명을 받는 동안 아래에서 백성들이 금송아지 상을 만들어 섬기는 것과 비슷한 모양새입니다.


아브람은 자신에게 들려오는  약속의 메세지를 눈으로 확인할  없었고  살아있는 동안에도 그럴  없겠지만  말을 ‘믿기로’ 결심했습니다그리고 하느님은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십니다.


어린 아이가 무언가를 사고 싶은데 자신은 돈을  능력이 없습니다 능력은 아빠가 가지고 있지요그래서 아이는 꾀를 냅니다.

아빠제가 공부 열심히 해서 성적을 올리면 제가 원하는  하나 사주세요.’

그러자 아빠는 그러마 합니다아이가 성적을 올린다고  성적이 물건을 사주지는 않습니다그러나 아이는아빠의 약속을 신뢰했고 성적을 올려 마침내 아빠와 함께  물건을 사러 갑니다아이가 아빠에게 가졌던 믿음과 신뢰가 자신의 능력으로는 얻을  없는 것을 얻게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구원을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내지 못합니다세상에서 아무리 착한 일을  사람이라도 스스로의 구원을 만들지는 않습니다구원은 오직 하느님의 선물입니다그러나 하느님은 우리의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시고  믿음의 의로움으로 하늘 나라를 선물해 주십니다.


다만  믿음의 약속은 그냥 주어지지는 않습니다믿음은 희생이 필요하고 시험 받아야 하고  시험은 현세에서 힘겨움으로 다가옵니다 시기를 드러내는 성경의 장면이 짐승을 바치는 장면이고 시기적으로는 ‘ 무렵이고 공포와 짙은 암흑이 그를 휩쌌다고 표현합니다그리고  죽은 짐승 위를 맹금으로 상징되는더러운 영들이 공격하고 마침내 성령을 상징하는 횃불이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성체를 모시는 방법

- 성체를 손으로 모시는 게 신성모독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일단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입으로 직접 받아 모셔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수난 만찬때에 제자들과 모여 함께 나눈 빵을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만 벌리고 받아 모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손으로 빵을 받아서 나누어 옆의 동료들에게 나누어가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성체에 대한 공경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감에 따라 부스러기 하나라도 흘리지 않으려는 극진한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리고 받아모시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또 입으로 모시다가 자꾸 사제의 손에 침이 발리니 위생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손으로 받아 모시게 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곳은 입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손으로 받아 모십니다. - 그럼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건가요? - 제가 보았을 때에는 성체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체를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손으로 모시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할 필요는 없지요. 여기서는(볼리비아에서는) 입으로 모시는 사람과 손으로 모시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고 둘 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모시는 이들의 혀가 제 손에 자꾸만 닿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이는 굉장히 비위생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모시는 것이 성체를 흘리고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모시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지요. 다만 손으로 모실 때에는 미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왼손 아래에 오른손을 받치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왼손으로 성체를 받아 뒤의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나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 손에 남은 부스러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입으로 가져가서 혓바닥으로 깨끗이 처리할 필요가 있지요

신부님이랑 목사님은 뭐가 달라요?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미사 봉헌

미사를 봉헌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간단하게 우리가 알고 있는 바를 말하자면 사무실에 가서 해당하는 비용을 내고 기도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올리는 행위를 ‘미사 봉헌’이라고 말합니다. 헌데 우리는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을까요? 미사를 봉헌하면 어떤 효과가 나타나는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연옥 영혼들을 위한 효과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망자를 기억하면서 그를 위해서 드리는 미사는 그 영혼에게 효과가 미칩니다. 물론 무슨 효과가 얼마나 미칠지 우리는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의 공로로 인해서 그 영혼은 자비를 입게 되고 자신이 채워야 할 수난의 시간을 메꿀 수 있습니다. 이는 수많은 성인들의 실제적인 증언으로 우리가 알게 된 것입니다. 또한 살아있는 이들을 위해서 드리는 미사도 그 효과를 발휘합니다. 하지만 이 때에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정성은 받아들여지지만 그 은총의 효과는 하느님이 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병자가 건강하기를 바랄 수 있지만 그의 건강의 회복은 오직 하느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가 건강을 회복하고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까지 아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이러한 효과들이 단순히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미사를 드리는 우리의 정성이 중요한 것이지요. 돈을 지불하는 것이 우리의 정성의 일부분이 되는 이유는 우리가 지닌 돈은 결국 우리의 정성을 모아서 벌어들인 돈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물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봉헌하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 더욱 소중한 정성입니다. 미사에 참례해서 진심으로 그 미사의 말씀을 듣고 성찬의 전례에 온전히 참례하게 된다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미사의 은총을 더욱 배가 될 것이 틀림 없습니다. 나아가 우리가 그런 미사 참례를 통해서 드리는 봉헌의 행위로 우리의 삶 자체는 변화될 것이고 무엇보다도 그 모든 은총의 결과물은 바로 우리의 몫이 될 것입니다. 저는 진실한 마음으로 미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