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기뻐하라’고 명령을 합니다. 이게 가능한 일일까요? 누가 기뻐하라고 한다고 기뻐지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요? 뭔가 기쁠 이유를 선물해 주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하다못해 손에 돈이라도 좀쥐어주고 기뻐하라고 하는 게 훨씬 설득력 있고 이해하기 쉬운 일이 아닐까요?
바오로 사도가 우리에게 명령하는 기쁨은 원래 우리가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 무엇이 있는지를 모르고 있다가 뒤늦게 깨달으면 그 기쁨을 느끼는 것과 같습니다. 휴대폰이 사실 주머니에 있는데 한참을 어디 두었나 고심하다가 마침내 내 주머니 안에 그대로 들어 있었다는 것을 인지하면 우리의 마음은 안도와 함께 기쁨을 느낍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자녀들은 자신의 본래적 신분을 올바로 이해하면 기쁨을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그 기쁨의 회복을 하는 데에는 이루어내어야 하는 몇 가지 과업이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서술합니다.
자신을 바로잡으십시오
물에 빠진 사람이 다른 물에 빠진 사람을 도와 주겠다고 나서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누군가를 식별하려는이는 먼저 자신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나의 내면의 방향을 올바로 잡아서 믿음 안에 굳건히 서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이도 살펴볼 수 있고 도와줄 수 있게 마련입니다.
서로 격려하십시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만 사로잡혀 있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아야 하고 격려해야 합니다. 여기서 격려라는 것은 마치 학창시절 운동장에서 교장 선생님이 하는 듯한 격려가 아닙니다. 교장 선생님은 그저 듣기 좋은 말만 할 뿐입니다. 믿음의 자녀들의 격려는 실제 믿음의 영역 속에서 하느님에게 나아갈 수 있는 도움을 말합니다. 그런 소리는 듣기 좋은 소리가 아니라 반대로 듣기 힘든 소리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서로를 격려하는 데에는 필연적으로 용기가 필요합니다. 세상은 특히나 우리가 하느님께로 나아가는길을 선물할 때에 뒤에서 빈정거리고 반대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양이 아닙니다. 양들은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 듣기 때문입니다.
서로 뜻을 같이하고 평화롭게 사십시오.
진정한 평화는 뜻이 같을 때에 이루어집니다. 뜻이 다르다면 절대로 평화로울 수 없습니다. 아무리 겉으로 조용한 외견을 보인다고 해도 사실 언젠가 터질 폭탄을 지니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부부 사이에 취미가 다를 수는 있어도 마지막 가는 목적지가 다르다면 이것만큼 안타까운 경우는 없습니다. 이 둘은 언제고 부딪히게 되고 터져버릴 간격을 늘 지니고 사는 셈입니다. 공동체가 진정으로 평화롭기 위해서는 하나의 뜻 안으로 모여 들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쉽지 않다는 것은 대표의 역할을 맡아 본 사람이면 누구나 아는 것입니다. 하다못해 경로당에서 어디에 놀러갈지를 정하는 데에도 사람들은 서로 분열되어 싸웁니다. 보이지도 않는 믿음의 영역으로 사람들을 이끌어 가려는 여정이 순탄하리라고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이러한 내적 가치를 함양시켜 나갈 때에 사랑과 평화의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바오로 사도는 가르칩니다. 하느님은 그 자체가 사랑이시고 평화이십니다. 그래서 오늘 강론한 내용을 다 잊어버려도상관 없습니다. 다만 하느님을 찾으면 됩니다. 그분 안에 진정한 의미의 사랑과 진정한 의미의 평화가 있기때문입니다.
댓글
신부님 가르침처럼 여유를 가지고 그 자체가 사랑과 평화이신 하느님을 믿으며 서로를 바라보고 격려하고 뜻을 같이하면서 평화롭게 살아가려고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