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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에 대한 대표적 오해




적지 않은 천주교 신앙인들 가운데에는 '착함병'에 걸린 사람이 있습니다. 착함과 착함병은 서로 다른 것입니다. 착함은 하느님의 선의 흐름에 동참해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옳은 것과 그릇 것을 잘 구별하고 옳은 방향으로 자신을 가꾸어 나가며 그 옳음 안에서 다른 이들도 초대하고 이끌어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복음의 용서도 이 흐름 안에 내포되어야 합니다.


반면 착함병이라는 것은 '착해 보이려는 노력'을 말합니다. 이는 사회적인 동의 안에서 착함에 대한 사상에 많이 영향을 받습니다. 일단은 부드럽고 순하고 상대가 하는 모든 말에 긍정을 표현해 주고 두둔해주는 식입니다. 이런 착함병 안에서 실제로는 착하지 않지만 외양으로 착해 보이는 이들이 있게 됩니다.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가 물에 빠졌습니다. 그를 건지기 위해서는 강한 팔힘이 필요하고 그의 피부에 상처가 나더라도 끈을 던져 그가 그것을 부여잡고 올려 줄 수 있는 강인함이 필요합니다. 그를 살려내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착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죽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착함병은 그가 혹시 피부에 상처라도 날까 싶어서 로프를 던져주지 않겠다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로프를 던져서 그가 그것을 잡았을 때에 강하게 끌어 올려야 하는데 그렇게 하다가 그의 깨끗하고 부드러운 피부에 상처가 나면 안된다는 식입니다. 이는 언뜻 그를 보살피는 것 같지만 결국 그가 물에 빠져 죽는 것을 그대로 방치하는 나쁜 행동이 됩니다.


용서라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요?


오늘 복음을 바라보는 착함병 신자들은 무턱대고 모든 어두움을 없다는 듯이 취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거듭해서 죄를 저지르고 그 어두움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데 그 대상을 용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진정한 의미의 용서가 아닙니다. 용서에는 근본적인 방향이 필요합니다. 빛으로 다가오려는 이를 용서해야 합니다. 그가 어떤 어두움에 있건 빛으로 다가오려고 할 때에 그를 강한 힘으로 이끌어 내어 용서를 선물해 주는 것입니다. 그냥 무턱대고 용서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냥 '복음을 믿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복음을 믿기 위해서 먼저 '회개하라'고 선포하십니다. 용서에는 반드시 회개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뉘우침이 존재하지 않는데 용서를 선물하는 것은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누구라도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이에게는 용서가 선물되어야 합니다. 그런 이라면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미묘한 차이를 몰라서 괴로워하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뉘우치지 않은 대상을 용서하지 못해서 스스로에게 불안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잘못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올바른 회개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용서를 기꺼이 선물해 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훗날 우리 각자의 저마다의 행실에 따라서 운명을 가르실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용서할 줄 몰라서가 아닙니다. 하느님은 뉘우치는 이라면 기꺼이 용서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고집스럽게 뉘우치지 않는 사람을 '강제로' 용서하는 일 따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건 용서가 아니라 가장 기초적인 질서의 파괴입니다. 만일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지옥은 존재하지 않아야 하고 우리가 가톨릭 교리를 가르치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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