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선조인 아브라함도 하느님의 약속을 쉽게 믿을 수는 없었습니다. 마치 작은 컵에 바닷물을 담을 수 없듯이 하느님의 원대한 계획을 인간의 작은 지혜가 담아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불가능'의 영역을 말씀하시는 것 같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사실 오늘날 우리도 이런 상황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에게 '구원'이라는 개념은 현세적인 용어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들의 구원은 지금 당장의 구원을 의미합니다. 어딘가 아픈 부위가 낫고, 부족한 재정 상태가 해결되고, 자녀들의 문제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식 따위의 눈 앞에서 체험할 수 있는 구원을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인지하는 구원은 실제적인 구원과 상당한 거리가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영원 안에서 구원하고자 하십니다. 그러나 영원을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은 이 구원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마치 초등학생이 사탕 공장에서 일하는 아빠와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것과 비슷합니다.
"아빠, 나는 사탕이 너무 좋아."
"그래, 아빠가 일하는 곳에 가면 사탕이 많단다."
"정말? 그럼 사탕이 5개 있어?"
"하하, 그보다 훨씬 많이 있단다."
"그래? 그럼 사탕이 한 봉지 있는거야?"
지금까지 아이가 체험한 사탕에 대한 경험은 기껏해야 한 개 아니면 두 개였기 때문에 그 아이에게 매일같이 쏟아지는 사탕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도 영원한 구원에 대한 감각을 올바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이해하지 못해도 믿고 따를 수 있는데, 적지 않은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니 없는 것으로 치고 눈에 당장 보이는 것들을 추구하기 시작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나병 환자가 나옵니다. 오늘 복음에서 특징적인 부분은 예수님께서 그에게 당부하시는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나병환자에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그의 내면이 아직 복음 선포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질병에 대한 치유를 바라지만 내면으로 많은 것이 덜 형성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에게 입단속을 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현대의 많은 신앙인들도 비슷한 상황입니다. 그들은 영원한 구원을 진정으로 바라는 간절한 내면을 갖고 있기보다 현세적인 어려움들이 해결되기를 바라는 초보적인 청원의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원한 구원을 간절히 바라기 시작할 때에 사람은 현세적인 어려움을 기꺼이 감내해 내기도 합니다. 마치 고3 학생이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 자신의 시간을 기꺼이 공부에 할애하고 노력하는 것과도 같이 영원을 올바로 인지하고 갈망하기 시작하면 오히려 현세 안에서 희생과 헌신을 위해서 애를 씁니다.
그래서 그런 신앙인들에게는 함부로 입을 여는 것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미흡한 욕구를 바탕으로 신앙에 다가서고 있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신앙에 활짝 열린 이들은 예수님이 찬사를 던집니다. 오늘 복음의 다음 구절에 백인 대장이 등장하는데 예수님은 그 이방인의 믿음을 두고 칭찬을 하기까지 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 와,
하늘 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들은 바깥 어둠 속으로 쫓겨나,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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