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면서 굉장히 자주 듣게 되는 세 가지의 핵심 키워드가 있습니다. 하나는 ‘믿음’이라는것이고 다른 하나는 ‘심판’,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구원’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세 가지를 면밀히 살펴보도록하겠습니다.
믿는다고 하는 행위는 어떻게 규정될 수 있을까요? 믿음을 단순히 성당에 등록되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외적으로 드러나는 단순한 행동이 아닙니다. 인간의 다른 행동들, 예컨대밥을 먹는다는 것은 어떻게든 음식을 입에 집어 넣으면 1차적으로는 완료하는 행위입니다. 맛을 느끼던 말건, 식사의 분위기가 어떻건 말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믿음은 그런 1차적 행위라는 것이 존재하기 쉽지 않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영적인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영혼의 의도를 쏙 빼놓고 얼마든지 외적인형식에 빠져들 수 있기 때문에 참된 믿음은 보다 심층깊고 내밀한 작업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믿음은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로 쉽게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올바른 믿음만 지니게 된다면 너무나 당연하게 그 사람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하느님은 준비해 두셨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교회는 이 ‘참된 믿음’을 너무나 쉽게 간과해 왔습니다. 무엇이 진정한 믿음인지에 대한 올바른 가르침 없이 이 믿음을 외적인 행위들로 바꿔 버리기도 했습니다. 기도를 몇 단을 바쳤는지, 성경을 몇 번을 통독했고 베껴 쎴는지, 신부님을 개인적으로 얼마나 알고 있으며 주교님 중에는 아는사람이 있는지, 성당에 건물을 짓는데 기부금을 얼마나 했는지… 이러한 요소들이 마치 믿음의 훌륭한 근거가 되는 것처럼 가르치면서 사람들에게 혼선을 불러 일으켜 왔습니다. 집에 주교님 표창장을 가지고 있다는사람이 실제 행동에 있어서는 오히려 세속 사람보다 더 타락한 모습 속에서 사람들은 마음이 산만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믿음은 ‘친교’를 떠올리면 이해가 쉽습니다. 친구가 되는 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서로를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저 단순히 오래 보았다고 자동으로 친구가 되지는 않습니다. 평생을 살아와도 서로 이해를 못하는 부부도 있게 마련입니다. 친교는 영혼의 결을 같이 나누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주님과 친구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무엇을 진정으로 바라시는지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도모하고 그것을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삶으로 채워 나가는 것이 바로 올바른 믿음을 향해 나아가는 지름길이 됩니다.
이제 심판과 구원을 함께 살펴 보겠습니다. 이 두 단어는 올바른 믿음에 대해서 깨닫고 나면 자동으로 이해가되는 것들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단순하게 요약합니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판을 빋지 않는 이가 곧 구원을 얻는 이가 됩니다. 심판을 받는 이는 가장 정의롭고 올바르신 하느님과 맞대면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심판을 피하기 위해서 할 일은 아들의 이름을 믿는 것 뿐입니다. 그러나 다시 앞에서 서술한 내용을 강조하자면 ‘믿는다’고 하는 것은 허례허식에 빠져 있는 가식적인 활동이 아닙니다. 믿는다는 것은 곧 ‘나는 하느님과 친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가?’를 자문해 보는 것입니다.
가끔 저를 잘 안다는 사람을 만나곤 합니다. 과거 고향에서 잘 알았답니다. 하지만 어쩐답니까 저는 그 사람을 모릅니다. 모르긴 해도 마지막 날에 비슷한 일이 수도 없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예상되는 시나리오는다음과 같습니다.
“어이, 주님. 저 잘 알지요? 접니다 저. 성당에 열심히 나왔잖아요. 헌금도 많이 내구요. 잘 알죠? 저 문 통과해서 들어갑니데이.”
그때 하느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나는 너희가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 내게서 썩 물러가라 악을 일삼는 자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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