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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다




무언가를 가르치는 사람은 그 대상이 전혀 알지 못하는 사실을 가르치게 됩니다. 이미 아는 것을 배우는 것은 큰 의미가 없는 일입니다. 학원을 갔는데 내가 이미 배운 구구단을 가르치고 있으면 비싼 돈을 주고 거기 갈 필요가 없겠지요. 마찬가지로 영적인 사정에서도 우리는 우리가 아직 모르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많은 시간을 신앙에 할애하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가 모르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어떤 신학적 정보나 교회사, 전례적인 내용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것을 배우자고 성당에 나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구원을 배워 알기 위해서 성당에 나아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구원에 대해서 이미 들은 바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과 부활과 같은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아도 보지 못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뜨겁게 타올랐다가 다시 오늘의 삶 속에서 세속성에 물들고 그 사고에 지배당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배우러 오는 것입니다.


오늘도 성경은 우리에게 '씨 뿌리는 사람'과 '씨앗'을 말합니다. 사실 성당을 좀 다닌 사람 치고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상당한 지식 정보를 지니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을 실천해 본 경험은 별로 없다는 데에 있습니다.


참외씨는 많이들 뿌려 보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참외씨는 뿌리면 현세적인 결실을 가져다 주기 때문입니다. 돈벌이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돈벌이가 되는 일이라면 기꺼운 마음으로 성심껏 합니다. 노력하는 만큼 상응하는 보상이 뒤따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우리를 통해 참외씨를 뿌리고 싶어하실까요? 세상의 주인이신 분께서 무엇이 아쉬워서 인간이 세속적으로 벌어들이는 것을 아쉬워 하시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뿌리고 싶어하는 씨는 아직 형성되지 않은 것, 하지만 하느님께서 간절히 바라시는 것, 즉 신앙의 씨앗입니다.


씨 뿌리는 사람이란 자신의 삶을 헌신해서 다른 이에게 신앙의 씨앗을 뿌리고 그들을 하느님께로 이끌어 오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씨앗'이라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요? 그것은 그런 영혼들에게 헌신할 수 있는 기회들을 말합니다. 즉, 복음을 전할 일감을 주겠다는 의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편하고 싶어하고 쉬고 싶어합니다. 우리는 더 잘 먹고 더 잘 쉬기 위해서 일을 하지 더한 고생을 얻기 위해서 일을 하려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신앙은 우리가 바로 그 어리석음에 뛰어들기를 바랍니다. 다음의 구절을 천천히 묵상해 봅시다.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과 먹을 양식을 마련해 주시는 분께서

여러분에게도 씨앗을 마련해 주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여러 곱절로 늘려 주시고,

또 여러분이 실천하는 의로움의 열매도 늘려 주실 것입니다.


이 말 안에 내포된 비밀은 하느님의 일에 헌신하는 사람은 더한 고생을 하게 될 것이고 더한 수고를 하게 될 것이며 그 영역이 점점 더 늘어가게 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결실을 선물하는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그렇게 해 낼 수 있는 온갖 기회들과 은총을 선물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결국 벗어버리고 말 세상을 움켜쥐고 살아가려고 애쓰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그 어리석음에 저마다 동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늘 성당에 오는 이유는, 그리고 성당에 와서 무언가를 배우는 이유는 바로 이 흐름을 깨부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어리석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믿음의 일에 헌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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