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을 전한다는 것에는 다양한 의미가 내포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다양한 의미를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지극히 단순한 차원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신앙을 전한다는 것은 통상적으로는 누군가를 예비자 교리반에 집어 넣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가 세례를 받는 것으로 신앙 전파는 일단락 되지요. 그리고 이것이 거의 모든 신앙인의 기본적인 입장입니다. 또 다른 경우는 신앙을 쉬고 있는 이들, 즉 주일미사를 나오지 않는 이들에게 판공성사를 보게 하고 주일미사를 나오게 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를 두고 대표적인 신앙 전파의 행동으로 간주합니다. 특별히 이 두번째 경우에는 ’냉담자 회두’라는 표현을 쓰지요.
하지만 신앙을 전한다는 것의 의미는 다양한 관점으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마다의 성숙도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실 신앙 전파는 정말 다양한 방법으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먼저 신앙을 전하는 기초 마련이라는 의미를 지닐 수 있습니다. 즉, 어둠에 빠져 있는 이들을 그 어둠에서 꺼내는 것이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그 어둠을 인식시키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자신이 어둠에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어둠을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런 이들에게는 ‘어둠’을 드러내어 주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사실상 저의 모든 활동의 가장 기초 단계이고 가장 많이 이루어지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어둠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어둠을 외적인 지표로 분별하려고 듭니다. 즉, 누가 주일미사에 나오면 빛의 자녀이고 주일미사에 나오지 않으면 어둠에 빠져 있는 것이지요. 누가 레지오를 열심히 하면 빛의 자녀이고 레지오도 하지 않고 평일 미사도 잘 나오지 않으면 어둠의 자녀라고 분류해 버리고 맙니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다릅니다. 빛과 어둠은 보다 내밀한 곳에 있는 방향성으로 정해지는 것입니다. 단순히 그의 외적 표지가 빛의 표지라고 해서 빛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고 또 반대로 외적으로 어둠으로 분류되는 곳에 있다고 어둠의 자녀가 되어 버리는 것도 아닙니다. 빛과 어두움은 그가 내적으로 선호하는 대상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그가 빛을 선호할 때, 즉 진리, 정의, 사랑, 선을 사랑하는 이가 빛의 자녀가 되고 그 반대의 방향으로 내면이 어둠을 사랑할 때, 즉 거짓, 불의, 증오, 악을 사랑하는 이가 어둠의 자녀가 됩니다.
그래서 빛과 어둠, 특히나 어두움은 아주 교묘하게 자신을 숨기고 있습니다. 내면이 선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는 사람은 좀처럼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 하고, 반대로 어둠을 향해서 나아가는 사람은 어떻게든 빛의 천사로 자신을 꾸미려 하기 때문이지요.
레지오도 열심히 하고 묵주기도도 열심히 바치는 사람이라 본당에서 소위 ‘열심하다’고 정평이 나 있는데 실상은 전혀 다른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악습에 쩔어 있고 늘 술을 즐기고 주변에 불화를 일으키고 다니는 사람이지요. 바로 이런 사람에게서 우리는 지표를 올바로 분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가 지닌 외적 표지, 즉 레지오를 오래 한 사람, 드러나는 기도의 횟수 등등과 전혀 상관없이 하느님의 자녀로서 참된 빛, 즉 진리, 정의, 사랑, 선을 드러내는지를 볼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신앙 전파의 첫 단계인 어둠에서의 구출은 단순히 외교인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에게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이는 진정한 회개에로의 초대인 셈이지요.
사람이 이 어둠에서 벗어나 빛을 향하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게 됩니다. 그때부터는 빛에 익숙해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즉 빛이 좋은 것이고 빛을 즐길 줄을 알아야 하지요. 그래서 그런 이들에게는 섬세한 보살핌이 요구됩니다. 자신의 어둠을 겨우 벗어버리고 이제 막 빛의 길을 걸으려는 이들은 마치 어린아이와도 같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선의 선물을 즐길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이들이 분별이 되고 나면 그들은 각별히 신경을 써서 아름다운 체험을 하게 도와 주어야 합니다. 지나치게 처음부터 무리한 운동을 시키면 나가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빛에 익숙해진 사람, 신앙 안에서 성숙도에 이른 사람은 본격적인 훈련이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때에 비로소 ‘십자가’가 다가오는 것이지요. 십자가야말로 우리의 내면을 강하게 다져주는 훌륭한 도구가 되니까요.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서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고 결국 사랑의 완성을 향해서 달려가는 것입니다.
사실 뒷부분으로 갈수록 설명할 거리가 없어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때부터는 체험이 줄을 이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지요. 체험을 해야만 알 수 있는 것을 아무리 설명해도 알 길이 없습니다. 인내를 설명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체험하기 전에는 절대로 올바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을 설명할 수는 있지만 절절한 사랑을 체험하기 전에는 절대로 그 사랑에 대해서 알 수 없는 법입니다.
신앙을 전한다는 것은 이처럼 다양한 방식으로 모두에게 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어느 순간 전해지고 마쳐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전해져야 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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