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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에 대한 올바른 이해



그분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습니다. 죄를 짓는 자는 모두 그분을 뵙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 자입니다. (1요한 3,6)

우리는 죄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죄가 아닌 것을 죄로 간주하고 또 죄인 것을 죄가 아닌 것으로 생각합니다.

간단한 예로 ‘주일미사 참례 여부’는 현 고해성사에서 참으로 중요한 대목을 차지합니다. 사실 수많은 신자들이 판공을 보러 오거나 아니면 미사 전에 급하게 뛰어와서 ‘지난 주 미사를 빠졌다’거나 혹은 ‘몇 주 동안 미사를 쉬었다’는 식의 고해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당장 눈 앞에 드러나는 그 계명의 어김이 가장 큰 죄로 간주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본질은 전혀 다른 곳에 있습니다. 미사에 빠진 그들은 말 그대로 죄인일 수도, 혹은 죄인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문제는 주일미사의 물리적 참여 여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간단한 예를 들어서, 볼리비아 시골에 차를 타고 흙길을 따라 2시간을 넘게 들어가야 하는 곳에 공소가 있고 사제가 한 달에 한 번 겨우 찾아간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곳에 있는 신자들에게 ‘왜 당신은 주일미사에 나오지 않소?’라고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도리어 사제나 교회의 일원이 매주 찾아가지 못하는 것을 안쓰럽게 생각해야 마땅하지요. 그런 이들에게 주일미사 참례의 의무, 아니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는 의무는 전혀 다른 형태로 드러나는 것이지요.

한국에서 어느 어르신이 주일에 일어났는데 평소에 앓던 류머티즘이 도져서 하루를 꼼짝도 못하고 끙끙거리며 집안에 머물렀다가 다음 주가 되어서 지팡이에 의지해서 겨우 미사에 나갔는데 과연 그 할머니가 죄를 고백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도대체 무엇이 죄이기에 말입니까? 그 할머니는 죄를 고백할 이유가 없습니다. 다만 이번에는 성당에 나올 수 있도록 잠시의 건강을 허락하신 하느님께 기쁜 마음으로 감사드리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일미사를 거르더라도 죄가 아닌 경우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일미사를 지켜야 한다는 계명의 근본은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라는 것이고, 세상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반드시 물리적으로 성당에 현존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러한 해석을 그릇되이 사용하는 경우도 충분히 생길 수 있기에 조심할 필요는 있습니다. 즉, 자신의 게으름으로 인해서 성당을 나오지 않았으면서 자기 자신은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둘러대는 식이지요.

반대로 주일을 나오면서도 주일을 거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즉 외적인 법 규정은 지키지만 실제로는 주일을 전혀 거룩하게 보내지 않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주일 미사에 나오는 이유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기보다 오히려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 위함인 경우가 있습니다. 그들은 주일에 나와서 사람들 앞에서 어떤 식으로든 찬사를 듣기 위해서 주일에 참례하는 것입니다. 또는 뭔가 인간적으로 매력을 느끼는 것이 있어 성당에 나오기도 합니다. 교사가 보좌 신부님과 회식하고 소풍 가는 것을 좋아해서 나오거나 청년이 연애 대상을 물색해서 나오거나 자매님이 계모임 대신으로 나오거나 형제님이 ‘신앙’이라는 이름 안에서 안전하게 술을 마시기 위해서 나오는 식이지요.

성당에서 하는 모임이 현재로서는 자신의 마음에 든다거나 식당과 같은 장사를 하는 이가 손님을 끌어 모으려고 성당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이들은 자신들이 충족시키는 욕구가 더이상 충족되지 않는 이상 당장이라도 성당을 그만두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기회는 언제라도 찾아오니 함께 일하는 이와 조금이라도 성가심을 느끼면 성당의 모든 것을 내던져 버리고 냉담상태에 돌입하곤 하는 것이지요. 하느님과의 만남 그 자체보다 인간관계를 중요시 하는 한 자신이 중요시하는 것이 무너질 때 그보다 덜 중요한 것은 언제라도 내던질 수 있는 셈이지요.

진정한 죄라는 것은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 죄는 외적인 법적 규정을 충실히 지키면서도 얼마든지 저지를 수 있습니다. 즉 주일은 전혀 거르지 않지만 ‘거룩함’과는 상관없이 살아갈 수 있지요.

혹자는 말할 것입니다. 주일 미사를 꼬박꼬박 나가는 것이 거룩함이 아니냐고 말이지요. 안타깝지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주일미사가 거룩함을 더하는데 도움을 주는가 아닌가 하는 것은 그의 일상 안에서 드러납니다. 주일미사라는 것은 ‘의무규정’이 아니라 삶의 근간이기 때문입니다. 주일미사를 올바로 드리는 사람은 그 미사의 근본인 ‘하느님의 현존’과 ‘감사’에 대해서 진실로 체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일상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고 늘 감사드리게 되지요. 반대로 주일미사를 의무감으로 드리는 사람은 여전히 세속적인 삶에서 거의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는 미사가 끝나기 무섭게 도망나갈 것이며 또한 주일미사 외의 시간은 온갖 세속적 쾌락으로 채우기 위해서 안달복달하게 될 것입니다.

수박이 겉모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속이 익었나 익지 않았나가 중요하듯이, 신앙생활도 그 외적 충실성만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내적 충실성이 중요하게 마련입니다. 선하고 의롭고 남을 존중할 줄 아는 것이 참된 신앙생활의 근본이 되어야 합니다. 묵주기도를 하루에 100단을 바치면서 교만하게 그것을 자랑하는 것은 그가 미성숙하다는 표지일 뿐입니다.

하느님 안에 머무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흉내를 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책을 사면 배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책을 가졌다고 자랑할 이유는 없지요. 설령 누가 그 책을 복사해서라도 배우면 그 배우는 내용이 중요한 것입니다. 양장본의 책을 값비싸게 구입했다고 자랑한들 정작 그 책을 전혀 읽지도 않고 책장에 처박아두기만 하는 것은 책의 근본 목적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안에 머무르는 자는 그 누구도 죄를 짓지 않습니다. 하느님 안에 머무르는 것 자체가 그를 죄에서 떼어놓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하느님 앞에 머무르지 않는 자는 언뜻 외적으로 가장 거룩해 보이는 행위를 하고 있어도 죄를 짓는 꼴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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