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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나와 같은 길을 가지 않고 같은 영역에 속하지 않은 이가 잘 되어 가는 것에 대해서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부정적인 반응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에게는 ‘시기’를 느낄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상대가 잘 된다는 의미는 하느님에게 한 걸음 더 나아간다는 것이며 그가 그렇게 하느님에게 한 걸음 더 나아가면 그 아름다운 은총이 자신에게도 주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시기는 세상의 자녀들의 몫입니다. 세상의 자녀들은 서로 시기하고 또 빛의 자녀들을 시기합니다. 세상의 자녀들이 진정으로 기쁨을 느끼는 순간은 오직 자신에게 이득이 되고 자신의 명예가 높아지고 자신의 권력이 확장될 때입니다. 그들은 절대로 타인의 기쁨에 진정으로 동참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매 순간 이 ‘시기’의 악덕이 마음을 사로잡고 있기 때문이지요.

세상의 자녀들은 타인의 잘 됨을 시기하고 그것을 무너뜨리고 파괴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자신이 그나마 가진 초라한 것이 돋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미 성경에서 말하고 있듯이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것마저 빼앗기데 될 것이고 어둠 속에 던져져 가슴을 치며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

나에게 잘못을 행한 이에게 반감으로 드러나는 분노라는 감정과 달리 이 시기라는 것은 그 정도가 더 심한 반감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시기하는 대상은 나에게 행해진 악이 아니라 상대가 얻게 된 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기하는 이들의 죄는 크고도 큽니다. 그러나 그들은 외적으로는 고상한 모습을 유지할 것입니다. 그들의 악한 의도를 감추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오히려 자신들이 악을 당해서 처지가 무너져 있다면 그런 이들이 꺼내는 분노는 이해할 만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시기’라는 것은 전적으로 악일 뿐입니다. 기쁜 일을 겪는 이들과 함께 하지 못하는 어둠이며 자신이 만들어낸 지옥일 따름이지요.

좀 심한 표현을 쓴다고 놀라지 마십시오.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인지 사람들은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특히나 하느님을 따르겠다고 나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일어나는 시기는 참으로 지독한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따른다고 착각하고 있는 그리스도와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한 몸입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하나의 몸이지요. 그러나 시기는 우리를 산산조각 내고 맙니다. 시기는 멀쩡한 지체들을 부패하고 썩게 만들어 서로 갈라지게 만듭니다. 시기하는 마음은 언제나 불화를 조장하고 이간질을 시도하고 결국 악을 행하게 되지요. 그러나 그들은 절대로 자신의 시기를 인정하려 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어두움은 얼마나 더 극심하겠습니까. 빛을 받아들여 자신의 어둠을 몰아내도 부족한 판에 빛마저 거부하니 말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껍데기를 쓸 수는 있어도 정작 그리스도는 거부하는 이들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취해야 할 합당한 자세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들이 이토록 사악하니 그들을 멀리하고 피해야 할까요? 아닙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무의미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들과 함께 평화를 유지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더한 선과 사랑과 축복으로 그들에게 다가서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마저 등을 돌리면 그들은 정말로 빛을 받을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겸손과 온유와 친절과 인내로 무장하고 그들과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밀과 가라지는 세상 끝까지 함께 자라게 될 것입니다. 심판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지 우리가 아닙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원수도 사랑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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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문제

고해소 안에서 마주하는 거의 모든 문제는 ‘관계’에 대한 문제입니다. 그만큼 관계가 소중하고 그 관계에서 문제가 일어난다는 말이기도 하겠지요. 이게 어떤 물건이라면 절대로 그 물건과의 관계를 가지고 오지는 않습니다. 물건은 필요할 때에는 쓰다가 필요가 없으면 버리면 그만이니까요. 하지만 인간관계는 특히나 가족관계를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관계가 문제가 됩니다.

일방적인 관계는 없습니다. 관계는 모두 상호적인 것입니다. 부모와도 배우자와도 자녀와도 친구와도 모두 상호적인 관계가 이루어집니다. 이게 내가 잘한다고 무조건 잘 되는 것도 아니고 또 상대가 잘한다고 그대로 잘 되어 가는 것도 아닙니다. 관계는 상호적으로 신경써야 하고 가꾸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계약’이라는 것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모든 관계 사이에 계약을 끼워두고 그 계약이 지켜지는 동안에는 관계가 유지되다가 계약이 깨어지고 나면 관계가 파괴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그들이 근간으로 삼는 계약관계는 이해관계에서 시작되고 그 이해관계를 가늠하는 핵심은 바로 나 자신의 이익입니다. 그래서 나에게 유익한가 아닌가, 나에게 필요한가 아닌가가 핵심이지요.

헌데 신앙인은 근본적으로 하느님과의 관계를 바탕으로 모든 다른 관계를 구축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상대와의 계약이 파기되더라도 하느님 때문에 다시 그 상대에게 다가서야 하는 이들입니다. 바로 이 점이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힘든 점이 되는 것입니다. 나에게 아무리 필요가 없고 쓸모없는 존재라 할지라도 하느님께서 포기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우리는 다시 한 번 노력해야 합니다.

고해소 안에 들어오는 이들은 자신에게 피로감을 안겨주는 관계, 혹은 자신에게 손해를 끼치는 관계 때문에 힘들어서 다가옵니다. 고해사제는 이 관계를 잘 점검해서 다시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켜주고 그로 인해서 또다시 그들에게 피로감을 주거나 손해를 끼치는 관계를 회복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쉬운 길을 선택하려고 합니다. 그냥 피곤한 관계는 …

속을 들여다보기

로봇에게 센서를 달아준다고 가정해 봅시다. 우리가 80년대의 기술을 가지고 있다면 아무리 좋은 센서를 달아준다고 해 보아야 그 수준에 맞는 센서를 다는 것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옛날 칼라 텔레비전으로 보는 수준의 화면을 인지하는 센서를 가지게 되겠지요.

만일 오늘날 로봇에게 최신의 센서를 달아준다면 그 로봇은 수만가지의 색상을 분별하고 세밀한 모습을 분별하는 센서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카메라 기술이 그때에 비해서 비약적으로 발전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영혼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분의 분별력의 섬세함이 너무너무 뛰어났기 때문이었지요. 예수님은 그가 이미 드러내고 있는 수많은 것들을 바탕으로 그의 영혼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아니, 영혼을 당신의 영혼으로 바로 바라보셨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그분에게는 누가 따로 설명을 해 드릴 필요가 없었습니다.

한 사람이 정말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아니면 믿음을 가진 척을 하는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진정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사랑이 넘치고 내면이 침착하고 영원에 대한 관심사가 남다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짓 믿음을 지닌 사람은 반대로 사랑이 없어서 사랑을 흉내내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면이 불안정하고 언제나 위태로운 모습을 보입니다. 그리고 영원에 관심이 없어서 그것을 애써 흉내내어 보지만 결국 자신이 실제로 원하는 관심사가 드러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에 우리가 집중하다보면 상대의 관심사가 드러나게 되고 그의 내면이 분별되게 됩니다. 가장 기본적으로는 선한 사람인지 선을 흉내내는 사람인지가 드러나게 되고, 또 기본적으로 선하긴 하지만 어떤 나약함을 지니고 있으며 어떤 부분이 보완되어야 하는지도 드러납니다.

지혜를 차곡차곡 쌓아 나가는 사람은 예수님을 닮아가게 되고 예수님이 하신 일을 기꺼이 해 낼 수 있게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으로 인해서 내면이 변해가게 되고 영적인 정밀도도 더해가게 됩니다. 그래서 유혹을 더 쉽게 피하게 되고 반대로 참되고 진실한 요소들은 그 …

[중요] 하느님을 알기

사람들은 하느님에 대해서 알고 싶어합니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겠지요. 뭔가 위대하고 거대한 분이 우리를 만드신 것 같은데 그런 분에 대해서 제대로 안다면 생을 살아가는 데에 얼마나 많은 도움이 되겠습니까. 하지만 그분에 대해서 안다는 것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니 이렇게 많은 시간 동안 하느님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고 외쳐대는 종교가 있음에도 여전히 사람들은 하느님에 대해서 모르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런 상황 자체에서 우리는 여러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은 그 자체로 알기 힘든 분이 아닐까요? 아니면 우리 자체 안에 그분에 대해서 알기 힘든 어떤 모종의 시스템이 존재하는 건 아닐까요?

첫번째 의문에 대해서 다양한 관점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 당신 자체가 알기 힘든 분이 아닌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일단 하느님은 ‘무한’한 분이시고 ‘영원’하신 분이시니 ‘유한’하고 ‘한계’가 있는 우리가 그분을 파악할 수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분을 아예 전혀 알 수 없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당신과 닮은 속성이 있어서 우리가 원하기만 한다면 그분에 대해서 알아 나가고 배워 나갈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 이 문제에 대해서는 ‘완전히 파악하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지만 그분을 아는 것은 가능하다’ 정도로 전제하고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두번째 의문은 어떨까요? 우리 안에 하느님을 알기 힘든 어떤 시스템이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요? 물론 하느님을 알 수는 있지만 그것을 방해하는 요소가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요?

사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아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가 우리 가운데 존재합니다. 이는 마치 우리가 빛을 바라보면 그것을 올바로 인식할 수 있지만 우리의 눈 앞에 우리가 미처 의식하기도 전에 ‘선글라스’가 씌워져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교회는 이를 ‘원죄’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하느님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우리 인간의 태초의 상태를 말하지요. 첫 인간의 범죄로 인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