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서 그 아기에 관하여 잘 알아보시오. 그리고 그 아기를 찾거든 나에게 알려 주시오.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 (마태 2,7)
이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누군가의 말이 아닙니다. 이는 예수님을 증오하는 헤로데 왕의 말입니다. 이제 막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을 떠올리며 동방의 박사들에게 헤로데왕이 전한 말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경배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철저히 숨겨야 했고 자신이 원하는 목적, 즉 이기심을 완벽하게 채우기 위해서 ‘거룩함’을 꾸미는 일까지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경배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실제로는 예수님을 죽이고 싶으면서 말이지요.
교회 안에는, 즉 교회라는 테두리 안에는 이런 이들이 존재합니다. 그들은 언뜻 안에 몸담고 있는듯 보이고 예수님을 경배하려는 듯이 보이지만 실제 예수님을 만나면 죽이려는 마음을 품고 있는 이들이지요. 이들이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의 거룩한 뜻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의 뜻이고, 자기 자신이 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입니다.
이들은 절대로 다른 왕을 모실 생각이 없습니다. 이들의 진정한 왕은 바로 ‘자기 자신의 뜻’입니다. 즉,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해야 하는 것이지요. 남들의 지시를 받거나 명령을 받는 것은 죽어도 싫다고 하는 이들입니다. 교묘하게 감추어진 이기성을 드러내고 교만과 아집과 독선에 빠져 있는 이들이지요.
물론 이들은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직접 만날 수도 있고, 간접적으로 만날 수도 있겠지요. 마치 헤로데가 예수님을 직접 만나지는 못하고 그분을 찾는 동방 박사들을 만난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난 그들은 결정을 해야 할 것입니다. 빛이신 그분을 따르던가, 아니면 여전히 자신의 세계에 고착되던가 하는 양자택일의 순간이 다가오는 것이지요.
헤로데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헤로데는 예수를 죽여 버리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실행합니다. 목적을 이루지는 못한 채로 말이지요. 왜냐하면 하느님은 그 하찮은 인간의 영리함을 훨씬 뛰어넘은 지혜를 지니고 계신 분이시니까요. 그가 죽인 수많은 아이들은 순교자가 되어 교회의 발판이 되었고, 아기 예수님은 거룩한 두 성인의 품에 안겨 이방의 나라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아기 예수를 찾고 있을까요? 찾는다면 무엇 때문에 찾고 있을까요? 그분을 만나면 알아보고 경배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죽여 버리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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