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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 다가왔지만 모두가 그 말씀을 받아들인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그들의 행실이 악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어둠의 행실이 말씀을 거부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자신의 내면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으니 우리는 얼마든지 속을 숨기고 멀쩡히 속과는 다른 외견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같은 말씀을 품고 있는 이들은 같은 말씀의 결과에 기뻐하고 행복해 합니다. 말씀이 전해지는 것에 행복해 하고 사람들이 빛을 얻는 것에 행복해 합니다. 그것이 같은 말씀을 따르고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누군가를 추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의 현실화를 바라보면서 기뻐하는 것이지요.

그렇기에 그들은 평화롭습니다. 하느님을 따르고 하느님의 거대한 섭리 안에서 일들이 올바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안심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비록 그들의 현실은 거칠고 때로는 온갖 풍랑이 몰아치지만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안정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반대의 사람들, 즉 같은 중심을 지니지 못한 이들은 저마다 불안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같은 중심을 지니고 있지 않기에 자기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언뜻 가장 지성적이고 논리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헛된 아성을 보호하기 위해서 진을 빼고 있는 자들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멋들어진 구호로 때로는 자기들끼리 ‘연합’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들끼리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졌기 때문일 뿐입니다. 언제라도 그것이 파괴되면 그들은 세상에 둘도 없는 원수로 변하고 말 것입니다.

우리 하느님의 자녀들은 그런 이들을 마주하면서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마냥 받아들이자니 너무나도 힘이 들고, 또 내치자니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배우는 사랑이 그것을 거부하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그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 하느님의 외아들이신 예수님이 보여준 십자가의 사랑으로 그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지만 그 받아들임에는 ‘분별’이 필요합니다. 내가 감당하지 못할 일을 받아들이는 것은 결국 나의 교만이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면에서도 교만은 작용을 하고 우리는 우리의 현실을 올바로 알고 겸손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삼가함’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열렬히 사랑을 해서 바꿀 수 있는 이가 있고, 또 하느님에게 내어 맡겨야 하는 이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능력이 부족해서 입니다.

초등학생에게 대학 원서를 맡길 수 없고, 유치원생에게 수십키로짜리 역기를 들라고 시킬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저마다의 능력에서 최선을 다하게 하면 됩니다. 맞지도 않는 옷을 억지로 입고서 편안히 살아갈 수는 없으니까요.

누군가는 선교사로, 누군가는 사제로, 누군가는 동정자로, 누군가는 세상 안에서 신앙인으로 살아갑니다. 누군가는 어둠에 빠진 이를 구하러 가고, 누군가는 이제 갓 빛을 받아들인 이를 일으켜 세우러 가며, 누군가는 자기 자신의 내면부터 올바로 세워야 합니다. 그런 분별 없이 모두가 같은 사명을 받았고 같은 일을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요구입니다.

이제 갓 사랑한 사람, 사랑이 불타오르는 사람, 용서라는 것을 배워 안 사람, 그리고 용서를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 또 기꺼이 용서하고 심지어 자신의 생명을 내어바치는 사람… 이처럼 우리는 여러 신앙의 단계에 머무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너무 조급해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단숨에 성인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도 단숨에 운전을 배울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운전을 조금씩 연습해야 하고, 마찬가지로 사랑과 용서도 조금씩 훈련해야 합니다. 그리고 때가 이르면 그것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하느님은 사랑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활활 타오르는 불꽃과 같은 사랑입니다. 우리가 아직 불순물이 남은 채로 그분에게 다가서면 우리 안의 불순물이 타면서 우리의 남은 사랑 마저 태워버릴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서서히 익숙해져 가야 하며 과욕을 부리지 않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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