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부터 성주간이 시작이 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을 하고 군중들은 환호를 하지요. 거기에서 파생된 것이 ‘호산나’라는 외침입니다. 미사 중의 호산나는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을 향한 군중의 환호였습니다. 우리는 매번 미사 중에 그 환호를 반복하지요. 그리고 또한 같은 성지주일날의 복음으로 우리는 주님의 수난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환영 받으신 이유는 ‘구원자’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환영한 군중들의 마음이 모두 같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적지 않은 이들이 예수님을 ‘현세적 구원자’로 바라 보았습니다. 질병을 치유해주고 현실적 고난을 해소해 줄 수 있는 세속적 구원자로 바라보았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권력가들 앞에서 힘없는 모습으로 드러났을 때에 군중들은 그분을 사랑하기는 커녕 십자가에 못박아 없애 버리라고 광란 속에서 외쳐댑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우리에게서 크게 다르지 않게 반복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깊은 신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에게 이런 저런 소용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교회의 권력이 필요하고, 그분의 명성이 필요하고, 그분의 가르침의 학구적인 내용이 나의 이론을 뒷받침하는 데에 필요하기 때문에 그분을 얼마든지 이용해 먹습니다.
하지만 그러다가 그분의 실제적인 가르침에 부딪히게 됩니다.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라는 가르침이지요. 그리고는 거기에서 막혀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현세적 개선에 도움이 될 때에는 그분을 얼마든지 받아들였지만, 그분이 나에게 일종의 ‘손해’로 다가올 때에는 나는 선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적지 않은 경우에 우리는 예수님을 버리고 나 자신을 선택합니다.
예수님은 버려지고 십자가에 못박히십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우리를 증오하는 게 아니라 우리를 변호하십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 저지르고 있는 일을 알지 못한다고 아버지에게 우리를 불쌍히 여길 것을 기원하십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살인자의 후손이 아니라고 외쳐댑니다. 하지만 솔직해 질 필요가 있습니다. 정말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할까요? 아니면 언제라도 수틀리면 가장 먼저 예수님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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