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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를 받아들이기


(Q)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 재임 시절 해방신학에 관해 조치 하셨던 노선을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달리 하십니다.
공동체 안에서 장상이 바뀌면 공동체가 앞으로 가야 할 노선이 변화 됩니다.
본당에서 주임 신부님이 바뀌면 본당의 신자들에게 노선이 바뀝니다.
이런 변화 앞에서 우리 평신도 들은 어떻게 생각 하고 받아 드리고 살아내야 할까요?
전임자 들이 틀렸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라고 하지만..... 좁은 마음과 아둔한 머리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어떤 형태로든 변화는 반드시 존재합니다. 사람은 그 자체 만으로도 변화를 합니다. 바로 ‘성장’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반대로 ‘퇴화’하기도 합니다. 물론 다른 형태의 변화도 존재합니다. 선에서 악으로의 변화도 있고 악에서 선으로의 변화도 있지요. 예수님도 ‘변화’를 일으키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바로 세상 사람들이 하느님을 사랑하도록 이끄는 변화였지요.

교회 공동체에서도 변화가 일어납니다. 크게는 전체 교회의 변화를 살펴볼 수도 있고 작게는 수도회나 본당 공동체의 변화를 살펴볼 수도 있지요. 2차 바티칸 공의회도 상당한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그 정신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지요.

변화라는 것은 여러가지 의미를 지닐 수 있습니다. 엇나감도 변화이고 되돌아옴도 변화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이를 올바로 분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변화의 근본이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무엇을 위한 변화인가를 잘 살펴야 하지요. 하지만 때로 우리는 하느님이 일으키시는 변화를 올바로 감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학식이 부족하거나 지적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바로 ‘사랑’이 부족해서 입니다.

성령께서는 수많은 변화를 일으키십니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들이 우리에게 다가올 때에는 ‘부당하다’고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비슷한 것을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도 예수님에게 느꼈지요. 그들은 예수님이 일으키는 변화를 바라보면서 그것을 받아들이기보다는 부당하다고 느꼈습니다. 자신들의 권위에 저항하고 모든 것을 무너뜨리는 것처럼 느꼈지요.

반면 수많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은 그 변화를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느끼고 체험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사랑했고 그분을 뒤따라다니면서 변화에 동참했습니다.

땅에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씨앗을 뿌려야 하고, 땅의 열매들이 자라나 있으면 추수를 해야 합니다. 어느 철없는 자녀가 아버지가 밭에서 하는 서로 다른 행동을 바라보면 ‘변화’라고 느끼겠지만 아버지는 ‘가꾸기’를 하고 있을 뿐입니다. 씨를 뿌리는 것도 가꾸는 것이요 추수를 하는 것도 가꾸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런 아버지의 행동이 자녀들에게는 큰 변화처럼 다가오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사실 변화를 일으킨 게 아니었습니다. 태초부터 존재하던 방향으로 사람들을 이끄는 일을 하셨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러 오신 것 뿐입니다. 헌데 문제는 사람들이었지요. 그들이 엇나가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원래 목적에 부합하는 행동이 ‘큰 변화’로 느껴진 것입니다.

교황님들의 결정이 때로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교회의 근본 방향에 변화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텃밭이 어느 정도 이루어져 가고 있는가 하는 문제인 것이지요. 받아들일 수 없는 결정을 섣불리 내어놓을 수 없고, 새로이 변화해가는 인류 앞에서 영원히 고착된 결정을 고수하고 살 수도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변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그분의 우리를 향한 사랑과 자비는 단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습니다. 변하는 것은 우리들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다가 그분에게서 멀어지고, 또 멀어졌다가 다시 그분에게로 돌아가고는 합니다. 마치 모세의 시절에 사람들의 삶이 올바르지 못해서 율법에 따라 이혼을 허용했다가 다시 예수님이 오셔서 원래는 그러한 것이 아니라고 하신 것과도 비슷합니다.

따라서 평신도로서 장상의 결정을 바라볼 때에 그 결정이 사랑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결정이 아닌 다음에는 그 결정에 따를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은 여전히 교회를 통하여 일하시고 장상들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다가가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 순명의 정신을 잃는 순간 아무리 우리가 옳다고 한들 우리는 근본적으로 엇나가고 있는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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