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부활하시고 살아계신 예수님은 직접 나타나서 우리들을 이끌지 않나요?
여기서 ‘직접 나타나다’는 말의 의미는 왜 우리의 두 눈에 직접 보이고 두 귀로 직접 들을 수 있도록 우리를 향해 다가오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즉 우리의 감각적 차원에서 느껴질 수 있도록 왜 그 어떤 활동도 하지 않느냐는 것이지요.
무엇보다도 먼저 물어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감각은 정말 믿을만 한것입니까? 우리의 감각은 정말 그렇게 진실한 것일까요? 내가 눈 앞에 있다고 믿는 것은 정말 있는 것이며 내가 듣는다고 생각하는 그것은 정말 듣고 있는 것일까요?
감각이라는 것은 지극히 객관적인 정보일 것 같지만 반대로 우리를 속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감각이라는 것은 물질적인 세상을 다루는 데에는 정말 필요한 수단이지만 영원의 진리에 가 닿기에는 부족함이 많은 것이지요. 마술이 마술일 수 있는 이유는 우리의 감각을 너무나도 쉽게 속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본다고 굳게 믿고 있지만 사실 허상을 보고 있을 수 있지요. 또 반대로 실제로 보는 것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가령 예를 들어 봅시다. 한 20대 여인이 자신이 좋아하는 메이커 핸드백의 진정한 가치를 알고 있을까요? 과연 그 여인은 그 핸드백에 대한 정보를 어디에서 접하고 무엇을 기준으로 그 핸드백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과연 그 메이커라는 것이 5살짜리 아이나 80살 먹은 할아버지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것일까요? 아니면 그것은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환경 안에서 설정되고 덮씌워진 가치인 것일까요? 우리는 사물을 단순히 보는 것으로 바라보지 않으며 실은 거기에 우리가 내면에서 설정한 가치들을 덮씌우는 것입니다. 달리 생각해보면 우리는 세계의 산업 자본이 형성한 가치들에 속고 있는 셈이기도 합니다.
코카콜라는 설탕 덩어리이며 남미의 가난한 이들에게 비만과 당뇨를 불러 일으키는 주범이기도 합니다. 헌데 사람들은 음료수를 구입하면서 더 싼 값에 살 수 있는 깨끗한 물 한 병보다는 코카콜라를 선택합니다. 자신들이 수많은 텔레비전 광고와 길거리의 광고판을 통해서 습득한 것을 바탕으로 그 설탕이 든 음료를 ‘좋은 것’이라고 인식하는 것이지요.
자, 이정도 한다면 일단은 ‘감각’이라는 것이 생각만큼 믿을 만한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감각은 생각만큼 신뢰할 만한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부활한 당시에도 여전히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제자들이 존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영원 안에 당신의 모습을 감추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지금 우리에게 나타나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분을 외적으로 감각적으로 체험한다고 해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사람이 태반이고 또한 본다는 것을 통해서 그 즉시 우리의 내면 안에 믿음을 형성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살펴보아야 하는 것은 인간이 자연의 진리를 거슬러 무언가를 체험하게 되면 인간의 내면에도 자연스러운 흐름이 깨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세상의 법칙은 존중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상의 여러가지 시공간적인 한계에 묶여 있는 것은 하느님께서 그것을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지성으로 새로운 여러가지 기술을 개발하여 이 거리를 단축시키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한계’라는 것을 체험합니다. 우리는 아직도 화성에 여행을 갈 수 없고 우리의 태양계를 벗어나지도 못합니다. 한계를 체험하는 것은 인간이 영원을 갈망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는 것이지요. 무엇보다도 우리의 생명이 한계가 있다는 것은 우리가 영원한 삶을 희망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헌데 이런 자연적인 법칙을 거슬러 다가오는 무언가에 대해서 인간은 충격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자유를 제한당하게 됩니다. 어린 시절 트라우마가 있는 아이는 그 비슷한 체험이 시작되면 자신의 트라우마를 바탕으로 일을 결정하게 됩니다. 강아지에게 심하게 물린 아이는 어른이 되어서도 강아지에게 함부로 다가서지 못하고 주저하게 되고 피하게 되지요. 그래서 하느님은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인간에게 다가오십니다. 그러지 않고 당신이 설정한 방법을 거슬러서 너무나 강렬한 방법으로 당신을 드러내시면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자유라는 것이 그렇게도 소중한 이유는 바로 자유 안에서 우리의 죄와 사랑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자유야말로 인간의 내면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고유한 영역입니다. 자유가 사라진 인간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유가 없어지는 순간부터 더는 인간의 존엄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외적 자유는 제한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환경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는 존재들이지요. 하지만 인간의 내적 자유는 그 무엇으로도 제한당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사랑이신 하느님이 그런 일을 하시지는 않지요.
하느님은 인간이 당신을 사랑하기를 바라시지 두려움에 덜덜 떨게 되어 억지로 사랑하는 시늉을 하는 것을 바라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우리를 존중하십니다. 우리에게 고유한 영역을 남겨두시는 것이지요. 그것이 하느님이 당신의 아들이 영원 속에 감추어져 있게 하시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당신의 외아들 대신에 ‘성령’을 보내셨고 교회를 형성하셨습니다. 우리가 지극히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당신에게 다가설 수 있게 하신 것이지요. 그래야 사람들이 스스로 결정을 하게 될 테니까요.
이런 이유로 예수님은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와 동떨어져 계신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지요. 예수님은 우리와 늘 가까이 계시며 우리를 도와 주십니다. 우리의 길이며 진리며 생명이신 분이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분은 찾는 이에게는 언제나 바로 곁에 머무르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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