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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리비아의 우편 제도


오늘은 우체국에 다녀왔습니다. 고맙게도 어느 분이 치초를 위해서 작은 소포를 보내셔서 찾아왔습니다. 덕분에 교구청도 들르고 시내 나들이도 하고 있지요. 지금은 작은 커피숍에 앉아 시원한 커피 한 잔을 즐기고 있습니다. 물론 에어컨도 빵빵하고 인터넷도 되는 곳입니다. ㅋ

이참에 볼리비아의 우편 시스템에 대해서 설명해 드리는 것도 좋겠군요. 볼리바아에는 아직 주소가 없는 곳이 많습니다. 그래서 우편 시스템이 엉망이지요. 그래서 ‘사서함 제도’가 있습니다. 우체국에 사서함을 1년 단위로 대여하고 그쪽으로 우편을 보내도록 하는 방식이지요. 우체국도 산타크루즈 도시 내에 한 군데 밖에 없습니다. 시내에 딱 한 군데 있지요. 그래서 우편이 오면 저에게 연락이 오고 물건을 찾으러 시내 우체국으로 가야 합니다.

소포의 크기가 2키로 미만의 소형 항공 우편물이면 찾는 곳이 따로 있습니다. 그곳에서 5볼리비아노(한화 800원 정도)를 내고 찾으면 일은 간단하게 끝납니다. 하지만 물건 크기나 규격이 규정한 것을 넘어서면 세관을 거쳐서 받게 됩니다. 그리고 세관은 볼리비아에서 까다롭기로 소문난 곳이지요. 세관에서 제시하는 규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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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행 규정에 의해서 다음의 것들을 지닌 화물 소포의 수입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 헌 옷, 헌 신발
- 화장품
- 알콜 음료
- 음식(SENASAG의 확인서를 첨부하지 않은 것)
- 약품(최대 3상자 그리고/또는 물약 - 대상자에 대한 의학 처방전 첨부할 시에만 허용)

그리고 그 밖의 상업 물품들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세관 규정 117조에 의해서 금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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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뿐만이 아닙니다. 물건 가격이 100달러를 넘어가도 안됩니다. 결국 보낼 수 있는 것은 소소한 것들 뿐이지요. 세관에서 이것은 ‘판매해서 돈을 벌기 위한 목적이다’라고 규정하는 순간부터 일은 복잡해지는 것입니다.

간혹 교포사목하시는 본당에서 신자들의 헌옷을 모아서 보내주시려고 하는 때가 있습니다. 뜻은 참 좋지만 선교사들 힘 빼는 일등 공신이기도 합니다. 세관에서는 무조건 이를 돈벌이 대상으로 규정해 버리고 선교사는 세관 서류 작업을 하러 이리저리 뛰어 다녀야 합니다. 또 세금을 엄청 때리기도 하지요. 그렇게 찾은 옷은 팔 아서 본당 재정을 충당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공소 신자들에게 나눠줍니다. 그렇다고 그 옷을 받은 사람들의 신앙이 부쩍 늘지도 않습니다. 그냥 주는 옷만 받고 미사도 나오지 않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세상은 돈이 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관심을 가지고 대합니다. 아무리 가톨릭 국가이고 본당에 기부하는 대상이라도 이것이 돈이 된다 싶으면 독을 품고 달려들지요. 그래서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근본 목적은 하느님의 말씀을 세상에 전하는 것입니다. 나머지 일들은 모두 그 핵심을 돕기 위한 부차적인 일들에 불과하지요.

선교사들을 위한 최대의 도움은 ‘기도’입니다. 선교사들은 선교지에서 영적인 전쟁을 치르고 있는 셈이지요. 이 전쟁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기도 하고 또 주변의 신앙이 미흡한 이들에게 신앙을 전하면서도 싸워야 합니다. 따라서 기도가 최대의 도움이 됩니다. 만일 선교지 본당에서 물질적인 도움을 요청하면 그 부분을 헌신적으로 도와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때로는 차량도 구입해야 하고 공소도 지어야 하니까요. 하지만 그런 구체적인 필요가 생기기 전까지는 ‘기도’가 최고의 도움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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