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는 나 말고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된다. 너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든,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든, 땅 아래로 물속에 있는 것이든 그 모습을 본뜬 어떤 신상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 너는 그것들에게 경배하거나, 그것들을 섬기지 못한다.’ (탈출 20,3-5)
이것이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내리신 명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그런 일들이 빈번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의 여러 동물들의 모습으로 상을 만들고 그것을 신이라고 선포하고 숭배하곤 했었습니다. 그 동물의 이미지들을 신격화한 것이지요.
오늘날 문명화된 사회에서는 그런 일은 없습니다. 물론 우리 이웃 종교인들은 우리 가톨릭이 그런 우상화를 하고 있다고 비판을 합니다. 하느님을 내면으로 섬기지 왜 굳이 ‘상과 그림’ 같은 것들을 만들어 내느냐는 것이지요.
만일 우리가 그 조각상들이나 그림을 그 자체로 ‘신격화’ 하고 있다면 그들의 비판은 정당합니다. 만일 우리가 하느님을 온전히 배제한 채로 그러한 이미지 자체에 영험한 능력이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우리의 미흡한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신앙은 바로 세워져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런 이미지들을 통해서 본연의 하느님에게로 다가갈 수 있다면, 즉 우리의 부족한 능력으로 인해서 무언가 눈에 보이는 것을 통해서 참된 하느님에게 다가갈 수 있다면 그것은 신앙에 도움을 주는 재료이고 도구이지 우상이 아닙니다.
우상이라는 것의 의미는 ‘하느님의 자리에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 그 자리에 있는 것’을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고유하게 누리실 수 있는 자리는 물질적인 세상의 어느 자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인간의 ‘자유의지’이고 우리의 ‘사랑’입니다. 즉, 우리가 마땅히 사랑을 드려야 할 분이 하느님이시라는 것이지요. 헌데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이 하느님이 아니라 다른 무엇이 될 때에 우리는 ‘우상숭배’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현대의 우상은 다름아닌 ‘돈’입니다. 혹은 ‘명예와 권력’이기도 하지요. 우리가 마땅히 하느님에게 돌려드려야 할 마음을 그러한 것에 쏟고 있다면 우리는 우상숭배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외적 껍데기가 아무리 신자임을 드러내고 있다 하더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의 내면이 어느 방향으로 향해 있는가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 근본에 하느님을 모셔야 합니다. 그 자리는 오직 하느님에게만 예비된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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