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새벽미사를 마치고 수녀님들과 아침식사를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저는 열심히 말씀의 씨를 뿌립니다. 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느냐 아니냐 하는 것은 각자에게 달린 문제이지요. 모두가 그 말씀의 씨앗을 받아들여서 영적으로 성장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세상은 그렇제 않습니다. 공동체에는 언제나 속을 썩이는 사람이 있게 마련입니다. 세상 어느 공동체도 ‘완전한’ 이들이 모인 공동체는 없습니다. 그 안에는 반드시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나고 있게 마련이지요. 하지만 가라지를 통해서 밀이 튼튼해지는 법입니다. 가라지가 없다면, 즉 사랑을 쏟아야 할 사람이 없다면 도대체 어디에서 사랑을 훈련할 수 있겠습니까? 모두가 천사라면 우리는 그저 모든 것을 편안하게 누리기만 하면 됩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지 않고 언제나 모난 사람이 존재하게 마련이지요.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행여 그릇된 마음을 지녔던 사람이 하느님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될 때, 그것은 진정으로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되고 우리의 보람이 되겠지요.”
사랑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가치있는 일이지요. 반면 증오에 사로잡히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사람들은 누군가를 미워하면서 힘들다 힘들다 하지만 결국은 미워하는 것이 사랑하는 것보다는 쉬워서 그러고 있는 거지요. 결국은 편한 길을 선택한 셈입니다. 용서하고 사랑하는 게 증오하는 것보다 훨씬 힘든 일이니까요.
사랑이 무엇인지 감도 잡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하지만 훗날 크게 착각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사랑에 대해서 거의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가 아는 것은 ‘거래’일 뿐이지요. 내가 준 만큼 상대에게서 되받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 거래 속에서 동맹을 형성하면서 살아갈 뿐, 진정으로 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가식의 가면은 힘든 일이 다가올 때에 벗겨지게 됩니다. 서로 좋을 때는 연합하지만 한 나라가 회생불가로 망가질 때에는 서로 반목하기 시작하게 되지요. 서로 젊고 아름답고 상대를 위한 사랑이 식지 않았을 때에는 좋다고 난리지만 나이가 들고 서로에게 지치기 시작하면 그때에 사랑의 본질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것들은 미리 예비되어 있습니다. 마치 씨앗 상태에서 이미 그 씨앗이 전나무가 될지 소나무가 될지, 아니면 잡초가 될지 결정되는 것처럼 이미 우리 마음 안에 뿌려진 씨앗에 따라서 우리가 어떤 나무가 될지 결정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말씀의 씨앗을 받아들여 영원의 나무를 키우지 못하고 세상의 씨앗을 받아들여 마구 뒤틀린 나무가 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스스로 결정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훗날 변명할 말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모든 것은 우리의 자유의지를 바탕으로 일어나는 것이니까요. 그 어느 것도 강요된 일은 없는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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