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모든 것을 ‘돈’, ‘물질’로 해석하는 데에 익숙합니다. 그래서 탕자의 비유도 물질적인 차원에서만 해석을 하려고 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방탕한 생활을 하지 않으니 둘째 아들이 아니라고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거의 모든 이들이 사실상 둘째 아들에 속한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오히려 큰아들에 해당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우리가 받은 것은 세상의 유산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나누어 받은 우리의 몫, 즉 우리의 삶과 자유의지를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우리가 원하는 대로 방탕하게 써버린 것이지요.
우리는 아버지의 집에 살기를 거부하고 그 집에서 나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정의의 테두리에서, 하느님의 선하심 안에,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 안에 머물기를 거절하고 마음껏 이웃을 증오하고, 불의한 방법으로 세상과 재물을 사랑하는 삶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아버지의 재산, 즉 우리의 삶과 자유의지를 헛되이 써버리고 말지요.
그러다가 어느 순간엔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는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서 마음 편히 아무 걱정도 없이 살던 때를 떠올리곤 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누렸던 올바름 안에서의 자유를 회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의 안정을 찾아 다시 아버지에게로, 하느님에게로 돌아오는 것이지요. 단순히 외적으로 부유하고 안정적인 생활이 아니라 바로 영적 부유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집에는 ‘먹을 것’, 즉 사랑이 가득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단순히 ‘교회’라는 외적 형태가 아니라 진정 하느님의 자녀들이 서로 사랑하고 아끼는 모습을 두고 ‘아버지의 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참된 교회 안에는 얼마든지 먹을 것, 즉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이 풍부하지요.
돌아온 아들에게 아버지는 온갖 좋은 것을 다 베풀어 주십니다. 좋은 옷, 반지, 신발, 살진 송아지가 대변하는 것은 아버지의 집의 온갖 좋은 덕행들을 의미합니다. 좋은 옷은 온갖 선한 가치들을, 반지는 믿음과 충실을, 신발은 보호를, 살진 송아지는 아버지의 넘치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는 하늘 나라에서 온전히 이루어질 것들이지요.
우리는 돌아가야 합니다. 아버지의 집으로, 온갖 좋은 영적 가치가 있는 아버지의 집으로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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