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왜 지금의 상황들이 펼쳐지는 것일까요? 인간은 죄를 짓고,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고 하느님은 끊임없이 그런 인간들을 다시 초대하는 상황 말입니다. 왜 하느님은 모든 것을 쉽게 만들지 않으셨을까요? 그저 위대한 기적 한 번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단순에 사로잡으실 수는 없는 걸까요?
하느님은 철저히 숨어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 편, 우리에게 끊임없이 부르심을 전하시지요. 왜 이런 형태를 택하시는 것일까요? 뭔가 확실한 표지를 주어서 우리가 앞으로 나아오게 할 수는 없었던 것일까요?
사실 표징은 주어졌습니다. 그것은 그분의 외아들이었고 예수님이셨지요.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세상을 향한 욕구들이 너무나 크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하느님보다 우리 자신들이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하느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당신이 원하시면 세상에서 듣도 보도 못한 가장 큰 기적으로 우리들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으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시지 않는 이유는, 그렇게 하는 순간 우리의 ‘자유’가 말살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누군가 죄를 짓기만 하면 번개에 맞아 죽는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과연 어느 누가 ‘감히’ 죄를 지으려 하겠습니까? 두려움에 벌벌 떨면서 절대로 엇나가지 않으려고 애를 쓸 것입니다. 하지만 그 엇나가지 않음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지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죽어버릴 테니까요.
하느님은 우리의 자유의지를 끝까지 남겨 두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선택하게 하지요. 아무리 유명한 신앙 간증을 들어도 우리는 끝까지 의심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하느님을 체험했다는 그 경험담은 어쩌면 그 사람의 착각일 수도 있다는 의심을 할 수 있지요. 왜냐하면 신앙은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강렬한 체험이라 해도 같은 체험 속에서 의심하는 사람이 있게 마련입니다. 갑자기 누가 병이 나아도 우리는 그 사람이 재수가 좋았다고 생각할 수 있고, 하느님 아닌 다른 무언가가 그를 낫게 했다고 의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선택이 우리에게 남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에서 사랑도 죄도 드러나게 됩니다. 끊임없이 하느님을 선택하는 것이 사랑이고, 반대로 하느님 아닌 것을 선택하는 것이 죄입니다. 단순히 율법 규정을 지키고 지키지 않고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근본 방향이 어디를 향해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하느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당신을 드러내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당신을 드러내는 순간, 우리의 선택은 완료되고 맙니다. 그때에는 더이상의 선택의 여지는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마주하고 영원을 살던가, 아니면 반대로 하느님을 등지고 살던가 하는 것이 되겠지요. 그리고 그것을 우리는 교리적인 용어로 천국과 지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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