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이라는 것을 억지로 가르친다고 될까요? 사람들을 억지로 끌어다 놓고 신앙에 대해서 이야기한다고 그들이 신앙을 배울까요? 그들이 화내지나 않으면 다행입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신앙의 가르침은 어두운 마음에는 도리어 역으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림자가 생기는 이유는, 빛과 그것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장애물이 없다면 빛이 다가올 때에 사물은 가까이 오는 빛을 더욱 반사해서 밝아지게 됩니다. 하지만 반대로 장애물이 있으면 빛이 다가올수록 어둠이 더욱 짙어지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준비되지 않은 마음, 즉, 빛을 받아들일 의지가 없는 마음은 빛이 다가올 때에 도리어 반대로 자신의 어둠을 더욱 짙게 만들어 버립니다. 거짓말을 즐겨 하는 이에게 정직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은 그들의 마음을 더욱 비꼬아 버리지요. 예수님께서 치유를 베푸신 이들에게 함구령을 종종 내렸던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악에 물든 이들이 다가오는 빛을 상대로 더한 악을 내어놓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빛을 아무리 막는다고 해도 새어나오는 모든 빛을 막을 수는 없었고 예수님은 결국 악인들의 시기와 증오에 희생되고 맙니다. 그리고 비슷한 운명이 주님을 따르는 이에게 예비되어 있지요.
듣기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끌여다 놓고 설교를 하면 절로 복음화가 될거라고 믿는 이들이 있습니다. 크게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복음화는 저마다의 수준과 상황에 따라서 가장 적합한 것을 해야 합니다.
엄마가 자녀에게 따뜻하고 맛있는 밥을 해주는 것이 왜 복음화가 아니겠습니까? 자녀들이 그 밥을 먹고 엄마의 사랑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도 훌륭한 복음화입니다. 힘들어하는 이웃에게 다가가 따스한 말 한마디 건네는 것이 왜 복음화가 아니겠습니까? 반드시 성경을 들고 설교를 해야 복음화가 아닙니다. 보다 실제적인 복음화는 바로 우리의 일상에 존재합니다.
지루한 미사는 나오기 싫어도 맛있는 밥은 같이 먹을 용의가 있는 친구들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밥을 함께 먹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렇게 저마다 좋아하는 것으로 다가오면서 결국에는 신앙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모두 그렇게 신앙에 다가왔습니다.
외적인 실적에 연연하지 않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숫자는 중요한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한 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분을 통해서 빛은 모두에게 다가왔습니다. 숫자가 많다고 해서 복음이 절로 전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려는 의지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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