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일에는 그 결과가 있게 마련입니다. 원래 의도했던 결과와 그 부수적인 결과들이지요. 예를 들어 예수님의 활동은 인류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부수적인 결과로 자신의 악을 더욱 공고히 하는 이들이 생겨나게 되었지요. 빛을 비추어 사람들을 이끌려고 했는데 예수님의 적대자들에게는 오히려 그림자가 더욱 짙어진 셈입니다.
우리는 모든 행위의 결과를 어느정도 가늠하고 일을 추진합니다. 득보다 실이 더 많은데 그 일을 하지는 않지요. 득이 있으리라고 생각을 해서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의 길을 접어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신앙을 통해서 손해를 보려는 것이 아니라 이득을 보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오직 세상적인 이해관계만을 바라보고 신앙생활을 포기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신앙이라는 것이 세상 안에서는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아 보이니까요.
신앙을 간직하고 전하려는 이들이 조심해야 할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무조건 신앙을 전한다고 좋은 결과가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원칙대로라면 좋은 것을 내어주니 그것을 받아들이고 올바른 길을 걸어가야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지요. 사람들은 좋은 것을 거부하기 일쑤입니다. 성당이 좋다고 가보자고 하면 거기에서 밥이 나오느냐 떡이 나오느냐 하면서 도리어 멸시를 하기 일쑤입니다.
따라서 지혜가 필요합니다. 사람들에게 다짜고짜 신앙을 직접적으로 전하려는 시도는 지혜롭지 못한 처사입니다. 사람들은 그러한 것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선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내어줄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능력이 되셨기에 기적을 행하셨고 사람들은 호기심에 그 기적을 따라 왔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모인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은 가르침을 전했지요.
하지만 우리는 기적을 행하지 못합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신다면 가능한 일이겠지만 오늘날 이루어지는 기적은 사람들을 끌어들이기는 커녕 사람들의 호기심만 잔뜩 자극할 뿐이고 복음 선포자를 더욱 곤란에 처하게 할 뿐입니다. 따라서 지금의 시대의 복음선포의 방법은 전혀 다른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빛과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은은히 비치고, 사람들이 필요에 의해서 찾는 존재가 되는 것이지요. 사람들이 찾는 것은 앙칼지게 복음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아니라 꾸준하고 책임감있고 성실하고 정직하고 선하고 온유하고 제 몫의 일을 묵묵히 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은 비록 악하지만 이런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호의를 지니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빛을 보고 찾아오면 비로소 그때에는 복음을 선포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예비자 교리가 있다고 성당에 가자고 하면 대뜸 따라나서서 갈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함께 식사는 할 수 있고, 차를 한 잔 나눌 수는 있으며 함께 삶을 공유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서로가 일치하는 가운데에 성당에 가자는 권유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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