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모습을 볼 수 있음.
2.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음.
3. 감촉으로 만질 수 있음.
4. 함께 음식을 나눌 수 있음.
5. 물리적인 한계에 제약을 받지 않음(장소 이동, 벽 통과)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이는 예수님이 물리적인 세상, 우리의 가시적인 세상을 ‘초월’한 분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완전히 따로 벗어나신 것이 아니라 여전히 우리와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요. 지금은 비록 모습을 감추셨지만 원하시면 언제라도 어떤 모습으로라도 이 세상에 나타나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차원을 예로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개미에게는 2차원의 평면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볼 수 있지요. 즉 개미의 차원의 한단계 위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원할 때에 개미 앞에 손가락을 두어 개미가 그 손가락을 느끼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원하면 개미를 집어 들고는 개미가 기어서는 절대로 갈 수 없는 다른 환경에 옮겨다 놓을 수도 있지요. 개미의 입장에서는 없던 손가락이 나타나는 것이고 그 손가락이 자신을 들어다가 전혀 새로운 곳으로 옮겨가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원하시는 곳에 언제라도 나타나실 수 있는 셈입니다. 그리고 원한다면 그 모습을 우리 눈에서 숨긴 채로도 우리를 지켜보실 수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실제로 예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그렇게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당신에게 진심으로 간절히 애원하는 사람에게는 더욱더 그렇게 하시겠지요.
성경에서는 ‘하늘’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합니다. 하지만 이 ‘하늘’은 단순히 우리 위에 있는 텅 빈 공간이 아닙니다. 하늘은 천상의 세계, 즉 예수님이 부활로 도달하신 세계, 하느님께서 만드신 비가시의 세계를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 하느님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표현하고, 또 우리가 죽고 나서 갈 곳을 ‘하늘 나라’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 이후에 바로 이 ‘하늘’에 속한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에 속하는 것은 단순히 죽음 이후에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가운데에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승천’ 하십니다. 즉 가시 세계에서 당신의 이전까지의 모습을 감추신 것이지요. 왜냐하면 그것을 남겨 두면 사람들이 거기에만 의존하고 자신의 성장을 미룰 것이기 때문입니다. 학생이 때가 되면 자기 스스로 공부를 해야 하는데 늘 선생님에게만 매달리고 문제 풀이의 비결을 다시 또다시 설명해 달라고 떼를 쓰기만 하면 전혀 자신의 실력이 늘지 않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승천’, 즉 가시 세계에서 들어 높여지셔야 했습니다.
성모님도 비슷한 의미로 ‘승천’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그것을 특별히 허락하셨지요. 성모님은 원죄로부터도 보호 받았고, 그 육신마저 들어높여지신 것입니다. 이는 성경에 나오는 지식이 아니라 우리 교회 전승에 의한 분명한 지식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 가장 작은 이 하나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 준 것이라고 말이지요. 누가 알겠습니까? 우리 주변의 어린 아이들, 노인들, 병자들, 가난한 이들, 소외된 이들이 변모하신 예수님이실지도 모릅니다. 그냥 상징적인 의미가 아니라 정말 예수님이실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그분을 받아들이던지 거절하던지 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결정인 것이지요.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