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2000년 전의 팔레스티나의 위대한 성인인가? 아니면 전 인류의 진정한 구세주인가? 우리 신앙인들은 답을 알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여전히 많은 이들의 무의식 속에 예수님은 진정한 구원자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고 그저 막연히 과거에 있었던 한 위대한 사람으로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심지어는 가톨릭 신자들도 이 믿음을 올바로 간직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진정 창조주의 아들이시며 영원히 살아계신 분이라는 것을 올바로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바로 옆에 있는 가족의 숨소리는 듣고 그들과 대화하면서 그들을 인식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을 쉽게 받아들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바로 ‘믿음’이라는 것이 부족하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우리는 주변에 수많은 사람들을 직접 만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모두 같은 마음으로 나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그들과 또다른 내적인 관계를 형성합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무언가를 부탁해야 할 때에 우리는 가장 우선적으로 ‘믿음이 가는 사람’을 찾습니다. 그가 아무리 멀리 살아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가 나의 부탁을 들어줄 것을 믿기 때문이지요.
이처럼 우리는 외적인 관계 내면에 전혀 다른 모습의 관계를 구축하고 있는 것입니다. 직장 상사 앞에서 겉으로는 웃지만 속으로는 온갖 비난을 쏟아붓는 것은 그와의 내적인 믿음의 관계가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이처럼 우리는 예수님과 외적인 관계가 아닌 내적인 관계를 형성해야 하고 그것을 ‘믿음’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과 이 ‘믿음’의 관계를 올바로 형성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은 그저 자기 삶의 한 옵션의 일부분일 뿐, 전적인 신뢰를 둘 수 없는 존재이지요.
그래서 그분이 하는 말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눈에 보이는 것들을 신뢰하려 하지요. 교회 안에서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생겨난 것인데 사람들은 가리키는 달을 보지 못하고 그 손가락만 바라보고 있는 셈입니다.
이로인해 엉뚱한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들의 시선을 두려워하는 일이 대표적인 케이스입니다. 내가 진정 하느님 앞에 어떤 모습인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워서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그릇된 모습이 진행되는 것입니다. 정말 하느님을 사랑해서 하는 기도가 아니라 해야 해서 하는 기도를 하고, 그 기도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려 합니다. 이런 저런 신심 프로그램 안에서 진정한 믿음을 구축하는 게 아니라 또다른 친목 모임을 구축해 버리고 말지요.
이런 비정상적인 신앙의 모습은 다른 이들에게도 신앙을 잘못 비추는 계기가 됩니다. 무슨 연수를 가고 피정을 가고, 특별한 행사를 하는 것이 신앙의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을 하고, 반대로 일상 안에서 내가 정말 변해야 하고 소중히 가꾸어야 할 것들은 소홀히 하는 결과를 낳게 되지요. 연수에 가서는 최고의 봉사자로 대접을 받지만 집에서는 제 할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천덕꾸러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분이 여전히 살아 계시고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바로 거기에서 모든 신앙생활의 근본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은 예수님을 모시고 있는 게 아니라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 계시는 하느님의 아들을 모시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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