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마태 18,35)
예수님께서는 뭔가 복잡한 걸 가르치신 것이 아닙니다. ‘주는 대로 받는다’는 아주 간단한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아무리 들어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알아듣도록 빚을 진 종의 비유를 해 주셨지요. 사람들은 그 비유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비유를 자신의 삶에 적용시키는 것을 힘들어 합니다.
왜냐하면 그 이유는 의외로 간단합니다. 그들에게는 ‘하느님’이라는 존재는 아직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비슷한 일이 눈에 보이는 ‘주인’과 일어난다면 금방 깨닫게 될 것입니다. 즉 자신이 다니는 회사의 CEO가 나에게 하례와 같은 은혜를 베풀어 보너스를 일억원을 주면 그 중에서 만원 정도는 길가는 거지에게 나눠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은혜는 눈에 보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하느님이라는 단계로 넘어서기 시작하면 거기에서부터 사람들은 결정을 해야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믿던가 믿지 않던가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적지 않은 사람들은 믿지 않기를 선택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과 눈에 보이는 것을 너무나도 사랑하기 때문이지요.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 자기 사랑을 우리는 ‘이기심’이라는 말로 바꾸어 부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사랑은 ‘진실함, 선함, 사랑’과 같은 가치들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좋은 것의 출처는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게 되고 따라서 계산적이고 이기적인 사랑에 머무르게 됩니다. 은총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아니, 우리 생명 자체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당연히 그것의 주인이신 분에게 감사드릴 줄 모르고 우리가 매 순간 받게 되는 생명을 허비하게 됩니다. 사람이 이 모든 것을 일순간에 깨닫는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죽음의 순간입니다. 인간은 죽음의 순간에 결국 이 모든 것이 스스로 이룬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인간은 단 1초도 머무를 수 없다는 것을 뒤늦게 깨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를 일찍 깨달아 살아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삶의 근본은 ‘감사’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도구이며 평화의 사도들입니다. 그들은 세상에 빛과 소굼과 같은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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