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만에 파라과이 한인 성당에 와서 한국어로 미사도 드리고 고해성사도 드리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새삼스럽게 알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율법주의’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무엇을 고해해야 하는지 잘 모르고 고해가 무척이나 형식적입니다. 판공이라서 고해할 뿐, 실제로 자신의 죄를 아파하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만일 자신의 죄가 정말 아프다면 그것을 반복하지 않으려고 노력할 테니까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증오와 사랑을 양측에 두고 자신에게 더 힘든 것은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차선책인 증오를 선택하는 것이지요.
비유를 하자면 이렇습니다. 자신의 새끼 발가락을 책상 모서리에 부딪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행위를 반복한다면 그것은 본인의 부주의일 뿐입니다. 만일 정말 그것이 아프다면 책상을 옮기려고 시도를 하던가, 아니면 자신이 걸어다니는 방향을 바꾸어 보던가, 그것도 아니면 신발을 신고 다니겠지요. 하지만 그런 시도 보다는 그냥 가끔씩 부딪히고 아파하는 것이 더 나은 것입니다. 나머지 것들은 귀찮고 성가신 셈이지요.
미사는 즐거운 것이고 우리 구원의 기쁨이 가득한 것인데 그 기쁨과 즐거움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스스로 구원 받았다는 체험이 없기 때문이지요. 그저 큰 죄나 짓지 않고 있으니 최소한의 ‘의무규정’만 이행하면 구원에서 멀리 있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이야말고 구원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내면의 상태입니다. 미지근하고 전혀 개선의 여지가 없는 상태이지요. 차라리 죄를 많이 지으면 그 마음 아픔에 하느님을 찾게 되겠지만 스스로 법을 잘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참된 마음의 회개를 경험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미사를 꼬박꼬박 나오게 되고, 판공을 꼬박꼬박 보지만 그 모든 행위들이 마치 푸석푸석 메마른 박물관의 전시품과 같은 상태인 것이지요. 안으로는 하느님을 향한 사랑도 열정도 없고 따라서 이웃은 성가심과 증오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수도꼭지를 틀어서 욕조를 가득 채워야 거기에서 바가지로 물을 퍼서 다른 이들에게 줄 수 있습니다. 헌데 그 수도꼭지가 잠겨 있으니 남에게 퍼줄 물도 없게 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이치입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이웃을 사랑할 능력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이유는 하느님을 만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만나지 않는 이유는 하느님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만나고 싶지 않은 이유는 여전히 세상이 좋고 자신의 미천한 욕구가 마음에 들기 때문입니다.
배우려 하지 않는 이에게는 가르치는 일이 소용없는 일입니다. 그릇을 엎어놓은 이에게 물을 아무리 많이 뿌려도 담기는 것이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먼저는 그릇을 돌려 놓아야 합니다. 하지만 제 그릇을 남이 돌려 놓을 수는 없습니다. 다만 설득할 뿐이지요. 인간의 자유의지는 본인 이외에는 아무도 건드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지막 날에 변명할 말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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