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기쁨이라는 것은 단순히 음악 소리를 크게 울리고 저녁에 모여 술판을 벌인다고 느껴지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 우리는 가장 고상한 기쁨을 가장 천박한 것과 뒤바꾸곤 하지요. 부활의 기쁨은 영원에 닿아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보증을 받았다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지요. 죄많은 인간이 죄에서 해방되어 영원한 구원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기념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 첫 테이프를 예수님이 끊으신 셈이지요.
하지만 이 기쁨을 느끼려면 이전 단계가 필요합니다. 바로 억눌려 신음하는 단계이고 희망을 품고 하늘을 바라보는 단계이지요. 그 신음에 동참하지 않으면 부활의 기쁨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이 그 어디에도 얽매여 있지 않고 스스로 자유로운 사람이고 충분히 즐거운데 굳이 부활까지 끌어들여가면서 기뻐할 이유는 없는 셈입니다. 그래서 그런 이들은 부활 동안에 색다른 육적인 즐거움을 찾는 것입니다. 기분전환 거리를 찾는 것이지요. 매년 반복되는 전례는 지루할 뿐이고 자신에게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 이들은 뭔가 색다른 요소를 찾아 헤메는 것이지요. 근본적인 기쁨에 동참할 수 없으니 그것을 피상적인 다른 기쁨으로 대치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부활의 기쁨이 대치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 저녁에 오뎅을 아무리 많이 팔아도 그것으로 부활의 기쁨을 대체할 수 있지는 않습니다. 봉사자들과 어울려 술을 걸치고 노래방을 가서 아무리 악을 써도 부활의 기쁨은 그렇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지요. 엠마오를 가서 아무리 영덕 대게를 먹어도 여전히 마음 한 구석은 공허한 것입니다.
부활의 기쁨은 사순의 수난에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 영원의 기쁨은 지상 생활의 허망함을 깨닫고 영원을 갈망하며 지상의 모든 수난들을 참아 견디는 데에서 마침내 다가오는 것입니다. 부활의 기쁨은 온전히 우리 자유의지의 거듭되는 훈련을 통해서 마침내 마음껏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모든 이가 알렐루야를 노래하겠지만 모든 이의 마음이 똑같은 것은 아닙니다. 부활은 가난하고 소외되고 불의에 희생당하는 이들의 몫입니다. 일상 안에서 충분히 쾌락을 누리고 즐기는 이들에게 남는 것은 떫떠름한 형식적인 전례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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