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마태 5,19)
모든 계명의 근본에는 ‘사랑’이 깃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들을 사랑하기 위해서 계명을 지키는 것이지요. 우리는 주일미사를 통해서 하느님을 사랑하자는 것이고 이웃을 사랑하자는 것이지 단순히 그 의무 규정을 철저히 준수하기 위함이 아닌 것입니다.
계명을 지킨다는 것의 근본 의미를 알지 못하면 우리는 엉뚱한 계명 준수를 이행하게 됩니다. 그러고서는 계명을 잘 지켰다고 자부심을 느끼게 되고 교만하게 되지요. ‘나는 딱히 특별한 죄가 없다.’라는 생각을 지니면서 자신의 입지를 드높이는 것입니다. 바로 그 안에서 점점 딱딱하게 굳어가는 교만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창녀와 세리들이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에게 뉘우침이 더 쉽게 작용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죄인들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고 하느님의 자비를 갈구하지요. 물론 뉘우치지 않고 도리어 고개를 빳빳이 세우는 창녀와 세리가 있다면 전혀 다른 문제일 것입니다. 하지만 죄인들, 특히나 불우한 생활 환경으로 죄스러운 삶에 빠져들게 된 죄인들은 자신들의 삶이 그릇되었다는 것을 인식하고 빛으로 나아가려고 합니다.
반면 부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안락함과 안일함에 빠져들어 있지요. 그리고 보다 그릇된 근본을 외적 형식의 준수로 감싸고는 괜찮다고 스스로를 위안하고 하느님을 자기 삶의 하나의 옵션으로 치부하고 마는 것입니다.
계명을 지키고 어긴다는 것을 두고 단순히 법적 규정을 준수하고 어기는 것으로 여기면 곤란합니다. 가장 근본인 사랑을 지키느냐 아니냐 하는 것을 살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당에 꼬박꼬박 나온다고 교만하다면 그는 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어기는 것입니다. 금육을 지킨다고 노부모의 건강을 걱정하는 며느리가 고기 한 점 국에 넣었다고 그것을 보고 화를 내면 그는 도리어 하느님의 계명을 어기는 사람이 되는 것이지요.
우리는 참으로 많은 것을 그릇되이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말 알아야 할 것은 모르는 경우가 많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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