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선을 행하는 데에 주저함이 없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선을 행할 자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악에 저항해야 합니다. 우리는 악마저 저지를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지만 그 뒤에 다가오는 책임은 분명히 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럼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일까요? 가장 간단한 구분은 ‘하느님의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부합하는 것은 선이고 하느님에 뜻에 어긋나는 것은 악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다시 질문이 파생됩니다. ‘무엇이 하느님의 뜻입니까?’
어느 나라는 하느님의 뜻이라면서 전쟁을 하고, 누군가는 하느님의 뜻이라면서 약한 이들의 인권을 무참하게 짓밟고는 합니다. 과연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일까요?
하느님의 뜻을 가장 잘 담아낸 분은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성령을 받은 이들에게서 하느님의 뜻이 이어지고 있지요.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의 뜻이 의심스러울 때에는 예수님에게 돌아가서 여쭈어 보면 됩니다. 하지만 이제 예수님은 승천하시고 우리 주변에 직접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대로 머물러 계시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수단들을 찾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경입니다. 하지만 같은 성경을 두고 이렇게 해석하고 저렇게 해석하고, 누군가는 제 입맛대로 해석하고, 또 누군가는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으로 해석을 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올바로 해석하는 권위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즉 가톨릭 신자들은 그 권위를 하나이고 공번되고 거룩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에 맡겨진 교도권에서 찾습니다.
언뜻 보기에 굉장히 복잡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도 복잡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하느님은 사랑이셨습니다. 그리고 그 뜨거운 사랑이 예수님에게 전해졌고, 그 예수님은 당신의 사랑으로 사도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자신의 공동체와 더불어 사랑으로 일을 하고 있지요. 이렇게 보면 모두 명료하고 간단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 악을 추종하는 마음, 분리하는 마음, 이간질하고 다투는 마음이 들어와서 복잡해지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는 종말까지 이어질 것입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밀과 가라지는 함께 자라게 됩니다. 밀은 하느님의 뜻을 찾아서 열심히 열심히 앞으로 나아가고 가라지는 그 일을 방해하기 위해서 온갖 수단을 다 사용할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와 함께 걸어가야 하고 어머니 교회를 사랑해야 합니다. 아무리 혼자 잘난 사람이 있어도 교회와 멀어지기 시작하면 그 자체로 엇나간 길을 걷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성령께서 살아계시는 한 교회는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끄는 훌륭한 인도자가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베드로 사도에게 약속하셨지요.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마태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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