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아야 하는 것을 보는 사람이 있고, 보고 싶은 것을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보아야 할 것을 보는 사람은 그분을 따를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통해서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하는 사람은 결코 예수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통해서 보아야 할 것을 보았고, 유다는 예수님을 통해서 보고 싶은 것만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님의 으뜸 사도가 되었고, 유다는 배반자가 되었습니다.
가령, 예를 들어 봅시다. 누군가와 다툰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예수님에게서 방향을 얻고자 예수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입니다. 만일 이 사람이 예수님에게서 진정 배워야 할 것을 배운다면 그는 ‘용서, 자비, 사랑’을 배우고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고 또 나아가 자신과 다툰 그 사람을 용서하게 됩니다.
다른 한 편, 자신이 보고 싶어하는 것만을 보려는 사람은 예수님이 바리사이들과 대적한 구절만을 쏙쏙 뽑아내고, 베드로에게 사탄이라고 꾸중한 부분을 뽑아내고, 성전에서 상인들을 쫓아낸 부분만을 뽑아내서는 예수님은 이렇게 불의에 대해서 적대적이고 열심히 싸운 투사였다고 우겨댈 것입니다. 그렇게 상대를 향한 자신의 미움과 증오를 정당화하려고 하겠지요.
이런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서 보고 싶은 것만을 보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결국 자신의 이득과 상충이 되면 가차없이 신앙을 내던지곤 하지요. 아니, 예수님을 비난하지나 않으면 다행입니다. 심하게 엇나간 사람은 교회를 욕하고 다니고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모든 것을 비난하기 일쑤입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이유는 자신의 높은 자아 때문입니다. 다른 표현으로 ‘교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교만해서 다른 이의 의견을 수용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늘 보고 싶은 것만을 보지요. 자신이 고르고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최고의 지성을 지니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으니까요. 심지어는 하느님과 그분의 뜻마저 자신의 마음대로 재단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일에 화가 나는 것이지요.
우리는 진정 보아야 할 것을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바라보고 그분의 뜻을 올바로 수용해야 합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