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루카 24,46-48)
제자들의 사명은 위의 내용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증인이 되는 것이고 그 증언의 내용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 그리고 죄의 용서와 그것을 위한 회개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핵심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되려는 누군가가 이상의 내용에 대해서 명백한 지식과 실천만 있다면 그는 충분히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아무리 교회 안에 몸담고 있다고 해도 위의 내용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면 그는 껍데기만 그리스도인일 뿐입니다.
먼저 수난입니다. 다른 말로는 고난, 고통, 단련 등등으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수난을 친구로 삼아야 합니다. 삶에서 다가오는 모든 종류의 고통을 올바로 인식하고 그것을 단순히 거부하고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고 견디고 이겨낼 줄 알아야 합니다. 수난은 그 수난을 치워 버리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그 수난에 상응하는 힘을 얻는 것이 목적입니다. 나를 성가시게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피해서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 사람이 일으키는 성가심에 상응하는 인내와 덕목을 갖추는 것이 목적인 것이지요.
죽음이라는 것은 하나의 현실로 때가 되면 누구나 겪는 것입니다. 다만 그 인식이 올바로 이루져 있지 않습니다. 죽음은 크게 두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육신의 죽음이고 다른 하나는 영혼의 죽음입니다. 육신은 반드시 죽게 됩니다. 하지만 영혼의 죽음은 전혀 다른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는 육신의 죽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하고, 반대로 영혼의 죽음을 피해야 합니다. 하지만 적지 않은 이들은 육신을 살리기 위해서 영혼을 죽여 버리기까지 합니다. 육신에 도움이 되는 돈을 몇 푼 더 벌자고 사정없이 거짓말을 해대는 사람은 육신의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 영혼을 죽음에 내맡기는 사람입니다.
부활은 다른 표현으로 ‘영원한 삶’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수난과 죽음을 이겨낸 사람은 이 부활을 입게 됩니다. 부활은 단순히 육신이 되살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은 참된 삶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 참된 삶은 하느님께서 선사하시는 전혀 새로운 삶으로 영원의 삶이고 영원의 행복입니다. 우리는 지금으로서는 이를 이해하기 힘이 듭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희망 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사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사람은 없으니 지금부터 부활의 삶을 온전히 알고 있다면 그 또한 별다른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모르는 채로 하느님의 선과 사랑을 바탕으로 그것을 갈망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용서는 이 모든 과정을 시작하기 위한 전제조건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의 상태에 놓여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등지고 있던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사실 거의 모든 사람이 하느님을 등지고 돌아서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서 열과 성을 쏟고 있지요. 그래서 용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의 용서가 존재하지 않으면 세상의 모든 죄지은 존재는 그 자체로 소멸되어 버리고 맙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우리 가운데 남아 있을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하느님은 지금도 여전히 세상을 향해서 당신의 용서를 펼치고 계시며 이 용서의 다른 표현은 관용, 자비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다루어야 할 주제는 ‘회개’입니다.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회개’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적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서 무시당하곤 합니다. 즉 회개하지 않은 채로 자신이 (율법적으로) 용서를 얻었다고 생각하고는 더욱 교만하게 살아가는 것이지요. 과연 우리가 회개를 할 때에 정말 진심으로 뉘우치는 회개를 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법적 형식을 준수한 회개를 하는 것일까요? 이에 대해서 우리는 타인을 심판할 수 없습니다. 이는 오직 하느님과 그 사람 당사자만이 아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회개하지 않는 이가 의외로 많음을 많이 시사하셨습니다. 거짓 회개를 하고, 위선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지요. 그들은 세상을 사랑하면서도 하느님을 사랑하는 척 위선을 떠는 것입니다. 그들은 훗날에 자신의 거짓된 삶에 대해서 막심한 후회를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위의 내용을 선포해야 합니다. 수난, 죽음, 부활, 용서, 회개에 대해서 우리 스스로 체험하고 나아가 그 빛을 주변에 전하는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님을 알리고 영원을 갈망하고 희망하도록 사람들을 하느님에게로 초대해야 합니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부족합니다. 만일 그 일을 하기 정 힘들다면 적어도 그 일을 할 수 있는 일꾼을 보내달라고 기도라도 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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