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병은 여러가지에서 기인합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병이 죄와 연관이 있다는 것을 쉽사리 연계시켜 생각하지 못합니다. 모든 병이 그러한 것은 분명 아닙니다. 그러나 사실 적지 않은 병이 자신의 죄와 상관관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죄은 인간에게 가책을 가져다주고 그 가책을 벗어나기 위해서 인간은 여러가지 엉뚱한 짓을 합니다. 술을 마시거나 쾌락을 찾아 나서지요. 그렇게 자신의 어둠을 잊어보려고 하는 노력이 결국 습관이 되고 하나의 병증으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인간의 내부적으로 죄와 그것으로 기인하는 스트레스가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사실 아무도 연구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하느님이나 사제가 아닌 다음에는 죄를 고백할 이유는 없기 때문입니다.
복음 안에서 우리는 죄와 병증의 연관관계를 드러내는 수많은 장면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죄를 용서하고 나서 병을 고치는 예수님, 그리고 서른여덟 해나 앓던 이에게 나중에 만나서 더는 죄를 짓지 말라고 당부하는 예수님, 또한 한 인간의 내면에 설치고 있는 마귀를 쫓으니 병증이 사라지는 여러 모습들도 볼 수 있지요.
진정한 죄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느님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죄의 근본입니다. 율법을 단순히 문자적으로 지키고 어기고 하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인 셈입니다. 진정한 죄는 하느님에게서 벗어나려는 것, 그분의 뜻에 어긋나게 살려는 모습입니다.
서른여덟 해를 앓던 이를 고쳐주는 장면에서 놓치기 쉬운 점 하나는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유다인들이 찾아와 멀쩡히 걸어다니는 그에게 안식일을 핑계로 죄를 덮어 씌우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38년 만에 처음으로 걸어다니는 것이라 기쁘기 그지 없지요. 그러나 그는 죄인이었고 자신에게 벌어진 기적을 스스로 체험하면서도 예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그보다더 더 오랜 죄악의 관습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율법주의적인 모습이었고, 인간의 시선을 두려워하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으로부터 ‘더는 죄를 짓지 말라’는 충고를 들은 후에 그는 바로 유다인에게 가서 고자질을 합니다. 그에게는 예수님을 향한 감사의 마음보다도 유다인들에게 인정을 받으려는 마음이 더 강하게 남아있었던 것입니다. 38년이나 고생하던 자신을 구원해 준 예수님을 온전히 신뢰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유다인들은 이를 통해서 예수님을 박해할 빌미를 잡게 됩니다. 앓던 이를 향한 연민에서 청하지도 않은 이를 고쳐준 예수님은 바로 그 일 때문에 더욱 유다인에게 박해를 받게 됩니다. 우리는 곧잘 병이 나은 그를 추켜 세우지만 어쩌면 일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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