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그것을 드러내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방식의 사랑받음을 기다리기 때문에 하느님의 사랑이 딱히 와닿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당신을 드러낼 수 있는 만큼 드러내셨습니다. 당신의 영을 받은 예언자들을 통해서 우리를 부르시고 구슬리시고 타이르시고 보듬어 안아 주셨지요. 그러다가 마침내는 당신의 외아들까지 보내신 것입니다. 당신과 완전히 닮은 그 아들 말이지요.
그러나 사람들은 그 앞에서 ‘표징’을 원했습니다. 자신들의 구미에 맞는 표징을 달라고 생떼를 쓴 것이지요. 선과 사랑과 진리로서는 그보다 더 큰 표징이 있을 수 없는데 또다른 표징을 내어 놓으라고 한 것입니다.
그들은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믿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믿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눈 앞에 드러난 사랑의 표지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지요. 거절하고 거부한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람들은 하느님을 찾습니다. 그분이 어디 있으며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느냐고 묻지요. 과연 그분은 어디 있으며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우리는 그저 편안한 의자에 앉아서 하느님이 다가와서 ‘나 여기 있네, 그리고 자네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받게’ 하고 입에 밥을 떠넣어 주기를 기다리는 것일까요?
오늘날에도 하느님은 여전히 활동하고 계십니다. 성령을 통해서 교회를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오고 부르고 초대하고 계시지요. 성령과 교회라는 것을 단순히 구조적이고 조직적인 제도교회로 착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건물은 건물이고 제도는 제도입니다. 하느님은 돌들에게서도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만들어 내실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은 여전히 우리 귓가에 들려오고 있습니다. 적어도 이 글을 읽는 여러분에게는 다가가고 있지요. 우리는 더 많은 표징을 찾을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열고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의심만 하다가 생을 보낼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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