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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부간의 갈등



(Q) 성서 여러 곳에서 ‘부모에게 공경하라’ 는 말씀도 있고 ‘부모에게 순종 하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구약 토비트 10장 12절에 시부모도 너를 낳은 부모라고 까지 말해줍니다.
마태오 복음 19장 5절은 ‘남자는 부모를 떠나 제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루리라’ 6절에는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고 말해줍니다.
분명 옳고 그름으로 분별해야 하고 옳지 않은 처사에 대해서는 부모라 할지라도 순종하지 않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 기준이 부부사이에서 서로 완전히 다를 때 남편들이 마음을 결정하지 못하고 중심을 잡지 못합니다.

고부간에 갈등 속에서 일어나는 많은 어려움 중에 있는 남편은 불효자가 되더라도 부부간의 관계는 깨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숙된 남편으로 살고, 하느님의 뜻을 바로 알아들을 수 있는 지혜를 갖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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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질문 속에는 여러가지 갈등이 혼합되어 있습니다. 단순히 고부간의 갈등, 즉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의 갈등이 있고 그 안에 아들이자 남편이라는 존재가 끼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을 근본으로 두고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느님과 일치하는 사람은 언제나 평화의 사도가 됩니다. 모든 갈등을 중재하게 되지요. 왜냐하면 하느님은 일치의 근본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추상적인 설명은 그만두고 보다 본격적으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먼저는 하느님 안에서 부모와 자녀의 관계입니다. 부모는 자녀가 어린 동안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씻기는 생존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활동과 나아가 정신을 튼튼히 하기 위한 교육을 해야 하지요. 하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 모든 것에 앞서서 ‘신앙’을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자녀의 영혼을 튼튼히 해 줄 수 있는 신앙을 올바로 세워 주어야 하는 것이지요. 만일 이 첫 단계에서 부모가 성공을 한다면 훗날 아예 갈등 자체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굳은 신앙 안에서 살아가는 부모는 장성한 자녀를 신뢰하고 그가 하는 모든 것을 응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설령 자녀가 세상에서 가장 엄청난 악녀를 데려와 며느리로 삼는다고 해도 부모는 묵묵히 자신의 아들을 신뢰하면서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기도하며, 자신에게 남은 생을 오직 하느님에게로 돌아갈 희망 하나만을 품고 살아갈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앙 안에서 충분히 교육을 시켰기 때문에 아들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에 대해서 무한한 신뢰를 품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이상적인 상황에 불과하고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기들 자신들도 신앙 안에서 올바로 추스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영적 어린아이 수준에 머무르고 있지요. 자녀를 향해서 쏟은 사랑을 되받기를 기다리게 됩니다. 즉 부모의 마음에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고 따라서 그 사랑을 신앙 안에서 충분히 보상받지 못하는 부모는 언제나 자녀들의 ‘인간적인 사랑’에 목매게 되는 것이지요. 바로 여기에서 갈등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럼 이번에는 배우자 선택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남자들은 자신의 배우자를 무엇을 기준으로 선택하는 것일까요? 만일 남자가 신앙 안에서 충실하다면, 즉 하느님을 간절히 사랑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다면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배우자, 하느님을 사랑하는 배우자를 고를 것입니다. 그러면 그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배우자는 자신에게 어떠한 환경이 다가오더라도 하느님을 우선으로 생각하고 사랑에 헌신하겠지요. 그렇다면 여기에도 갈등은 없는 것입니다. 그 어떤 유형의 시부모를 만나더라도 하느님의 거룩한 계명 속에서 참아 견디고 하느님에게 기도하면서 모든 고충을 내어 맡길줄 알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역시 이상적인 경우에 불과합니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배우자를 고를 때에 그의 영혼과 하느님을 향한 사랑을 우선시 하는 지혜를 갖지 못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끌리는 배우자를 선택하지요. 배우자의 미모가 좌우할 수도 있고 사회적 위신이 좌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든 저든 신앙에 비할 데가 못되는 것을 바탕으로 배우자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배우자, 즉 아내는 남편의 ‘인간적인 사랑’에 목매달고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이미 다른 관계와의 갈등은 예비되어 있는 것이지요.

가로늦게 상황이 극단적으로 치닫는 경우를 바라보면서 대부분의 남편은 상황을 한탄하게 됩니다. 그리고 어디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하나 혼란스러워 하지요. 그러나 이는 우선순위의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보다 근본적인 것에 있습니다. 따라서 고부간의 갈등은 무슨 기계의 ‘사용 설명서’ 처럼 명확하게 선이 그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이러한 경우는 부모에게 순종하고, 이러이러한 경우는 아내를 사랑하라는 메뉴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지요. 모든 것은 하느님 안에서 분별이 이루어져야 하고 사실 그 분별은 이미 한참 전에, 즉 혼인이 이루어지기 전에 이루어졌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명하신 것은 변함없이 그대로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은 그대로 유지되고 또한 아내와 한 몸을 이루리라는 계명도 그대로입니다. 그리고 올바른 분별 속에서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은 분명하게 대처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만일 부모가 하느님의 뜻에 정반대로 어긋나는 것을 아들에게 강요해서 며느리를 증오하게 하고 갈라서게 한다면 남편은 하느님의 거룩한 뜻 안에서 가정을 충실히 지켜야 합니다. 또 반대로 아내가 너무나도 사악해서 하느님의 뜻에 정면으로 대치되는 것을 끊임없이 강요한다면 이에 대해서도 남편은 하느님 안에서 올바른 충고를 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런 극단적인 경우는 굉장히 드뭅니다. 대부분의 경우는 양측에서 남편의 인간적인 사랑에 기대하고 그것을 기다리면서 서로 앙숙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즉, 기껏해야 명절날 인사를 친정으로 가느냐 시부모댁으로 가느냐로 부딪히는 정도이지요. 즉 대부분이 일상의 소소한 충돌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남편 또한 위대한 성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남편 역시도 부족함이 많고 신앙적으로 부족한 사람인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집안에서의 소소한 갈등은 모두 우리 영적 훈련의 일환이 됩니다. 우리가 인내심이 없고 자비롭지 못하고 사랑이 부족한 데에서 기인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소소한 충돌이 일어날 때마다 다시 마음을 하느님에게 돌이키는 기회로 삼고 기도하고 사랑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완벽한 사람들이 아닌 이상 갈등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모든 갈등 속에서 열심히 스스로를 살피고 훈련시켜 나가야 합니다.

고부간의 갈등은 하느님의 부재로 인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부모, 남편, 아내 가운데 단 한 명이라도 하느님을 향한 진실한 신앙을 품고 있다면 갈등은 사전에 예방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진실한 신앙인은 빛과 소금의 역할을 통해서 자신을 죽여서 평화를 이룰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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