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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제가 좋은 사제인가?




우리는 모세에게서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오늘 민수기 안에서 드러나는 모세의 모습을 몇 가지로 모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는 사람들의 비방입니다. 우리는 흔히 좋은 사제는 사람들의 칭찬을 듣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모세가 사람들에게 그것도 가장 가까운 미르얌과 아론에게서 비방을 듣는 장면을 목격합니다. 그 비방은 그들의 '시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건 그들이 하는 말에서 잘 드러납니다.

"주님께서 모세를 통해서만 말씀하셨느냐? 우리를 통해서도 말씀하시지 않았느냐?"

그들의 이 비방에 대해서는 훗날 진실이 드러납니다. 그들의 죄의 결과물이 미르얌에게 닥쳐오면서 말의 진실성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들은 공연한 비판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사제직의 하나의 특성을 드러냅니다. 사제는 모든 사람의 관심의 중심에 있으면서 그와 동시에 많은 적대감의 대상이 됩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기분이 좋을 때에는 좋은 말을 해주다가도 자신의 이익과 상반되는 일이나 사건을 마주할 때에는 사제에 대해서 비방을 서슴지 않습니다.


오히려 칭찬만 받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를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하느님의 뜻에 맞는 사제이기보다 사람들의 환심을 사려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참된 사제는 자신의 부족함 가운데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선포하려고 애를 쓰고 그 자연스러운 결과로 비방을 받게 됩니다.


물론 혼동하지는 맙시다. 자신의 어두움의 결과물로 비방을 받는 것을 마치 십자가의 짐을 지고 있는 양 꾸며대는 사람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좋은 사제는 성실하고 책임있는 사명의 수행 가운데에서 비방을 받게 됩니다.


둘째는 겸손입니다. 성경은 숨김이 없습니다. 모세라는 사람은 매우 겸손하였고 땅 위에 사는 어떤 사람보다도 겸손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겸손에 대해서 올바른 고찰이 필요합니다. 무턱대고 자신을 낮추는 것이 겸손이 아니라는 것은 누차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겸손은 하느님 앞에 서 있는 자신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드높으심 앞에 서 있기에 그분의 명령이 가장 중요한 일이 되고 반드시 이행해 나가야 하는 소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오히려 세상 안에서 강단있는 모습을 드러냅니다. 겸손은 사람을 유약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강하게 만듭니다. 하느님 앞에서 겸손하기에 하느님이 강하심을 신뢰하는 것이고 그 강하심 안에서 세상에서 다가오는 어떤 소명이라도 기꺼이 수행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겸손한 사제를 오해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영혼의 겸손의 외견은 오히려 딱딱함으로 비춰지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하느님께서 생명의 주인이시고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이 주인이신 생명을 수호해야 합니다. 그런 와중에 하느님 앞에 겸손한 사제는 교회의 가르침을 굳건히 선포하고 지켜 나가야 합니다.


하지만 그런 그의 모습은 외적으로는 양보 없는 무대뽀로 비춰질 것입니다. 겸손은 커녕 자신의 생각에 고착화된 교만한 사람으로 비춰질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하느님 앞에 겸손한 사람입니다.


셋째는 자신을 공격한 사람을 위한 기도입니다. 거룩한 사제는 최종적인 사건의 결말을 미리 앞당겨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악인을 위해서 기도해 줄 수 있는 영혼의 크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모세는 자신을 비방하다가 악성 피부병에 걸린 미르얌을 고쳐 달라고 하느님께 청합니다. 하지만 악인은 자신의 어두움을 고발하는 의인을 위해서 절대로 기도하지 않을 것입니다. 기도라는 것 자체가 사실 무엇인지 모를 가능성이 큽니다. 그들이 하는 기도는 위선적이고 거짓스런 형식의 기도일 뿐, 누군가를 위해서 진정으로 기도하는 자세는 찾아보기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의인은 악인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 매일같이 희생하고 기도합니다.


이것이 민수기의 모세의 모습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사제의 세가지 단편입니다. 이는 하나의 장면일 뿐입니다. 사실 좋은 사제는 냇가에 심어진 나무와 같아 늘 잎이 푸르고 그 열매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구원을 선물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제를 신뢰하고 그 옷자락 술에 손이라도 댈 수 있다면 그는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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