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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적 이득이 안된다면 안하는 게 낫겠습니다.




복음에서 바리사이의 질문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과거에는 '이유가 합당할 때에 부부가 갈라서도 된다'라는 것을 사회적 기본 틀로 삼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세상은 마찬가지입니다. 이혼에 관한 사유가 정당하면 갈라서는 것이지요. 하지만 천주교는 여전히 꽉 막힌 것만 같은 이미지를 지니고 있습니다. 혼전 순결에 관해서도 또 이혼에 관해서도 세속적 차원과는 전혀 다른 원리를 고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확고하고 단순합니다. 신앙 안에서 부부를 이루는 사람들은 '한 몸'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일은 간단해집니다. 우리 스스로의 몸을 살펴보고 생각해 보면 됩니다. 우리의 몸을 어떻게 잘라내면 반으로 정확하게 잘라낼 수 있을까요? 정답은 '그러다가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의 몸을 반으로 가를 수 없습니다. 그건 말도 안되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몸이 잘라지지 않느냐고 굳이 묻는다면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 중에는 한 팔을 잃고도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리를 잃고도 살아가는 사람이 있으니까요. 그러나 그것 또한 곰곰이 생각해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심장과 머리를 벗어나서 잘려나간 부분은 스스로 생존할 수 없습니다. 죽음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령 부부가 문제가 생겨 세속의 이혼을 한다고 해도 그 탓이 있는 쪽은 하느님에게서 벗어나는 것이고 영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자신에게 탓이 없이 이혼을 당했다면 다시 다른 누군가와 결합하려고 애쓰지 말고 하느님 안에서 충실히 살아가는 것이 좋습니다.


혼인 교리를 본격적으로 하려는 건 아니니 이 정도로 하고 다음 주제로 넘어가겠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대답합니다.


"아내에 대한 남편의 처지가 그러하다면 혼인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말은 그 의미하는 바가 이렇습니다. 결혼하는 것이 세속적으로 전혀 이득이 되지 않는다면 차라리 하지 않는 것이 낫겠습니다. 좀 더 식별하자면 '나에게 득이 되지 않는 것은 하지 않겠습니다.'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숨은 진실이 드러납니다. 혼인이라는 것은 서로 세속적 이득을 보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소명이라는 것입니다. 신앙 안에서 드러나는 혼인이라는 것은 하느님을 중심으로 서로가 서로를 위해서 약속하고 헌신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라는 것은 불타오르는 욕정이 아니라 십자가의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헌신과 희생의 사랑인 것입니다. 부부는 서로에게 희생해야 하고 나아가 자녀가 태어나면 그 자녀를 위해서도 헌신해야 합니다. 부부의 자리는 신앙 안에서 희생과 헌신을 훈련하는 자리인 것입니다.


나아가 예수님은 이해하기 힘든 가르침을 전합니다. 바로 '고자'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첫번째 유형의 고자는 태어나면서부터 혼인이 불가하게 된 사람을 의미합니다. 두번째 유형은 사람들의 손으로 그렇게 되는 경우입니다. 세번째는 하늘 나라를 향한 스스로의 의지로 그렇게 되는 이들입니다.


첫번째 유형은 태어나면서 '불구'를 지닌 이들입니다. 특히나 현대에 민감한 사안이기 때문에 따로 더 다루지는 않겠습니다. 두번째 유형 가운데에서 과거에는 '환관'이나 '내시' 같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현대에 독신을 지키는 이들 가운데에서 아직 온전히 자신의 의지가 정결의 삶에 동화되지 않은 사람도 여기 포함이 됩니다. 그들은 피치 못하게 독신을 지키고는 있지만 아직 의지로 완전히 동의하지 않은 상태이고 걸려 넘어지기 쉬운 상태입니다. 마지막은 보석같은 이들입니다. 사도 요한 같은 이들이고 현대의 동정자들 가운데에서도 하늘 나라라는 소중한 가치를 끌어 안아 현세적 삶의 소중한 부분을 기꺼이 하느님께 내어 바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 마지막 부분은 받아들이기 쉽지 않습니다. 그만큼 하늘 나라를 사랑해야 이해할 수 있는 가르침입니다. 마치 이른 새벽에 등산을 해서 그 아침의 서늘한 공기를 들이키는 기분을 느껴보지 못한 사람은 왜 그 짓을 하려고 드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하늘 나라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는 이 가르침을 이해하고 하늘 나라 때문에 스스로 고자가 되기를 기꺼이 선택하기도 합니다.


사람은 세속적 이득만으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영적인 이득도 함께 존재합니다. 세속적 이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삶이지만 영적인 이득이 가득한 삶이 있습니다. 모쪼록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삶의 기쁨에 동참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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